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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로출발하다.

86년 11월 18일 (화) 아침은 유난히 맑고 하늘도 파랬다. 나는 일본 동경에서 곧바로 이민 수속을해서 호주로 오는것이였다. 공항 나리다까지는 리무진 버스로 2시간을가야하니 공항시간을 계산하면 아침 7시에는 일어나야 비행기를 타는데 아침7시가 넘도록 잤다. 집사람이 한심스러운듯 깨웠다.

그럴법도했다. 대망의 이민을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도 아랑곳없이 자고 있는 내모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우선 가족을 데리고 가는것보다 나혼자 먼저가서 집과 최소한의 살림살이를 준비하고나서 식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의 따뜻한 인사를 받고 집사람의 출영을 맞으며 공항까지 조흥은행 동경지사장 고향 장선배가 내어준 차를타고 무사히 도착해서 집사람과 커피숖에서 따뜻한 커피한잔에 토스트 두조각을 먹고 비행기를 탔다.

곧 정상 괘도에 올랐다. 나는 눈을감고 시드니까지 안전하게 가게해 달라고 그리고 동경에 남은 내사랑하는 처와 아이들을 잘 붙들어주시고 낯선 이국땅에서 직면할 일들이 차질없이 잘되도록 인도해달라고 기도했다. 인생 만년에 가족을 데리고 호주이민을 떠나 새로운 신천지에 새인생을 개척한다는것이 오로지 나만의 뜻이 아닌 것 으로 위로해 보고싶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인도하심으로 믿고 위안을 했다. 지금 내가 44세 이렇게 늦게 생활터전을 옮겨야할 절박한 이유는 아무리생각해도 없었다.

이민결심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해외주재생활을 사우디 아라비아, 영국, 독일, 일본 약 12년 넘게 해외에서 살다보니 1974년부터 86년까지는 한국에서는 경제가 급성장했고 아파트개발과 분양도 활발했고 부동산 값도 올랐는데 서울서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분양도 받고 부동산 재택크로 상당히 사는 모습이 풍요러워 보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서울이 발전하는 호경기에 아파트한번 사보지도 못하고 돈도벌지못해 서울이 나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아이들도 국민 학교 코흘리개가 벌써 고3이 되었다. 학교는 여러나라 옮기면서 전학을 하다보니 그야말로 아이들 교육은 알롱달롱하였다. 그런데 서울로 들어가면 교육에 문제가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보려고 하와이에 사는 친구에게 학교 입학관계를 알아보라했다. 친구가 사립학교 교장선생님과 면담을한후 나에게 한번들어와서 직접 상담을 해보는것이 좋다고하여 하와이로가서 교장선생님을 만나 입학허가를 받고 입학금을 먼저 지불하고 등록을 해야한다 해서 아이들 셋 입학금 50%를 지불하는것이 큰부담이였으나 준비를해서 지불하고 하와이친구 에게 아이들 기숙사나 기초준비사항은 부탁을 해놓고 동경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보낼려고 미국영사관에 비자신청을 했더니 이게무슨 날 벼락인가? 미 영사관에서 비자가 거절되었다. 영사관에 비자거절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한국사람의 자녀들 미국비자는 한국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받아야한다고 했다. 즉 제3국에서는 미국비자를 못받는다는것이다. 한국에 들어 갈수도 없고 해서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교입학금 지불한것이 문제였다. 원래는 환불이 안된다한다. 친구가 애를써서 결국은 50%만 받을수 있는데 결국은 그50%도 못받고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 차일피일 못받고 끝이났다. 세상일이 잘안될경우 표현하기 힘든 여러가지 생각 이 교차하여 내잘못을 큰 교훈으로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일이라서 그만 두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이번에는 카나다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로 아이들 유학을 좀 알아보라 했다. 친구에게서 편지가왔다. 내용은 아이들 유학을 보내면 영주권이 없으니 사랍학교만 갈수 있는데 등록금이며 교육비에 생활비가 꽤많이드는데 차라리자네가 이민을 오면 모든것이 해결 된다는것이다. 마침 금년부터 투자이민을 받는다고 했다. 이민 허가관계 서류를 동봉했으니   보라는 것이다. 살펴보니 투자이민 허가조건에 어렵지 않게 통과할것 같아서 당장 투자이민 서류를 만들어 카나다 대사관에 신청을 했다. 약 1개월후면 연락이 갈것이니 기다리라했다. 그러나 일개월이 지나도 연락이 오질 않아서 그것도 안되는것인가 걱정중인데 그 다음 주 회사 손님과 아까사까 (동경시내 한국식당과 클럽들이 있는 지역)에 저녁을 하러갔다. 식사중이였 는데 외국손님몇이서 들어와 우리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중 내가 잘 아는 일본 친구가 있어   소개를 받고 함께 인사를 했다. 그 중 한 명이 호주 대사관 영사인데 투자이민 담당이라했다. 눈이 번쩍띠어서 식사끝나고 차한잔 하자 해서 장소를 옮겼다.

호주가 살기 좋다던데 관광가고 싶으니 관광 비자 좀 해달라했더니 반가워하면서 내일 자기 사무실로 오라했다. 이튿날 갔더니 벌써 감을 잡았는지 봉투속에 서류가 있으니 보고 언제든지 환영이라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읽어 보니 카나다에 제출했던 이민서류와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동일했다. 나는 이미 제출했던 서류 를 지명만 시드니로 바꾸고 제출하러갔더니 어찌이렇게 빨리 준비했느냐고 묻기에 사실 이미 카나다에 이민신청을 했는데 한달이 지났는데고 소식이 없다했더니 지금으로 처리해볼테니 조금만 기다리라했다. 약 2주후 서류전형이 통과되었으니 가족 신체검사하라는 통보를 받고 즉각 가족을데리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에 서류봉투가 하나있었다. 뜯어보니 카나다 대사관에서 신체검사하라는 통보였다. 신체검사는 가족 1인당 약 200불인데 돈 이 이중 들기 때문에 카나다는 신체검사 안하기로하고 호주로 가기로했다.

호주규정상 투자 이민 최종승인을 받을려면 부부중 한 명이 호주사전 답사를 하고와서 호주가 좋으니 가서 살겠 다하는 서명을 해야 결제가 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집 사람이 혼자 시드니가서 일주일 사전 답사를 했다. 호주에는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으니 이민관보고 누구 한 사람 소개를 해달라 했더니 호주성당의 신부를 소개해주었다. 집사람은 신부님과 만났으나 그는 워낙 바쁘신 분이라 안내하고 돌아다닐수 없어 그 성당 신자중에 신실한 한국사람 부부를 소개해 주셨다. 그 분은 오래 전에 이민을 오셨다. 친절하고 좋으신 부부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잘지내다가 자녀들이 모두 한국에 있는 외국기업에서 근무하여 노후를 아이들과 함께하기위해 서울가서 사신다. 집 사람이 호주에 가보니 영국과 분위기가 비슷하고 기후도 좋고 조용하여 좋다고 하였다.

 

그 뒤 우리는 비자를 받고 호주로 떠나야하는데 진짜 큰 문제가 앞을 막았다. 내가 사표를 내었더니 회장님이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당장 서울로 들어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하늘이 캄캄함을 처음 느껴보았다. 나는 그당시 동경에서 “D”그룹 회사중 건설부문과 철강 회사 두 회사의 일을 맡고 있었다. 중요한 계약관계도 진행중이여서 난관에 봉착하였다.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 도 미결은 처리하고 회장님의 작별인사를 받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을 들어가 회장님을 뵈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것은 처음이였다. “더이상 들을말도 없고 할말도 없으니 없던것 으로 할테니 당장 동경으로 복귀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만둔다면 회장에대한 배신이라 생각해 도 되겠느냐? 라고 무거운 말씀을 하셨다. 그 뒤 사표를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한번 올렸고 회장님이 일본에 한번 나오셔서 못가게 만류하셨다. 그때 나에게 질문을 하나 할테니 대답해 보라는 것이다.

“친구 둘이, 하나는 평법한 가정에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대학도나오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차근차근 진급하여 이제는 회사의 글로벌 확장의 중요한 임무로 영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친구이고, 또 한 친구는 가난한 집안 형편상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서 노점상부터 출발하여 부자로 성공했다 하자 사회에 두사람이 명함을 내 놓으면 세상은 누구를 더 성공한 인생이라 믿어주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더니 회장님은 “일본은 이미 20년 전 부터 좋은 회사의 경영자를 더 높히 평가하는 사회가 되었고 한국은 앞으로 20년후면 경영 자를 더 평가하는 세상이 된다. 왜냐하면 기업을 통하여 사회에 공헌할 기회가 더 많기때문이 야” 라고하셨다. 나는 할말을 잃고 있었다. 몇달이 흘렀고 비자 유효기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비자기간을 놓치면 이민은 취소된다.

비자가 끝나기 이틀전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못하고 회장님께 편지를 썼다. 회장님께 관대한 관용을 호소해야 하는것이 참 어려운 현실이였다. 결국은 석장에서 두장으로 두장에서 한장으로 요약했다. 내용은 회장님의 은혜와 인연은 영원 히 벗어날수 없습니다. “D”그룹이 호주에 지사가 없으니 회장님 사람 하나를 좀일찍 호주에 파견해 놓는 다고 생각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전략의 기초를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적고, 자원이 풍부한 잠재력이 있는 나라에 두어야 하는데 저가 보기에는 호주가 적합한 요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 록키산맥의 마그네틱 광산 매장량이 세계최대지만 광산 채굴 권리는 미국이 아니라 벌써 일본상사가 쥐고 있듯이 우리도 호주에 발을 들여놓고 자원 에도 투자기회를 탐색하셔야합니다. 저가 호주로 간들 회장님 사람이지 누구이겠습니까? 회장님의 신년사가 세계방송을 통해 울려퍼질때 감격과 열정으로 박수갈채를 보낼수있는 회장님의 사람 하나가 호주에 먼저 가서 길을 닦는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뵙지못 하고 떠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부디 건강하시옵고 안녕히 계십시요. 라고 인사말을 끝내고 밀봉하고 나리다 공항 비행기를 타기전에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탑승을 했으니 그심정이 어떠 했겠는가?

일본에서 철강관계일로 인연을 맺은 철강회사 회장님을 잘 알게 되었는데 이분은 장님이신데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고 인간관계를 지극히 중히 여기시는 훌륭하신 분이다. 2차대전직후 패망의 일본경제가 피팍하고 어렵고 파란만장한 전후 혼란시기에 은행에서 융자를 받어 갚지못하고 부도내는 악덕 기업도 많고 은행도 손해보는 그런시기에 손님 접대를 하다가 소주를 마셨는데 악덕상인이 만든 메찔 알콜을 먹고 장님이 되셨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고물상으로 시작하여 도매상이되기까지 은행과의 약속은 생명같이 귀중히 지켜 신용을 쌓아서 재정악화로 회사에 위기가 왔을때, 이런 회사를 안도와주면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하면서 은행이 융자를 해주어서 다시 재생할수 있었다는 감동실화의 주인공이신 한국인 회장님이셨다. 나는 그 어른을 존경했고 그래서 이민을 간다고 인사를 갔다. 그 회장 아들이 그 회사 사장이였는데 나와는 가까운 친구였었다. 이민을 간다고 말씀드렸더니 붓으로 종이에 다음을 적어주시면서 명심하고 언제든지 쌀 떨어지면 다시 봇다리싸서 돌아올수있는 용기를 가지고 가라 하시면서 내미는 글자가 ” 이시노 우에 3년”즉 차가운 돌위에서 3년을 견디고 나야 주위가 보인다.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덤비지 말라. 3년을 돌위에 앉아 참고 견뎌라라는 교훈을 주셨다.  그 교훈이 마음의 큰 길잡이가 되었지만 미약한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지키지 못해 후회한 몇 가지도 나중에 피력하고져한다.

비행기를 타고 별별생각이 교차하였다. 편지를 받아보신 회장님의 분노가 어떠하실까? 내 퇴직금은 어떻게 될까? 후임에는 누가올까? 그러나 이미 던져버린 주사위요, 날아간 화살 이였다. 지금 부터가 내문제다. 복잡한 서울로 들어가서 경쟁과 스트레스속에서 산다는것이 그리고 그 복잡한 사회구조속에서 스트레스가 대물림되겠지?  넓은 세계무대로 나와서 힘을 길러 업을 이루고 힘을 쌓아 그 힘과 에너지를 조국을 위해 바칠수있다면 그것이 진정 애국 아닌가?

영화 한장면 보다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여 잠시 쉬는동안 자카르타에 있는 일본 수미토모 상사 지사장 야마다에게 내 소식을 전했을때 그는 깜짝 놀랐다. 다시 발리섬으로 향했다. 발리는 관광지여서 피서객들의 편한 복장으로 터미널이 붐볐다. 3시간을 기다려 시드니로 출발했다.

잠시 후 앞좌석에서부터 종이 메모한장이 전달되었다. 참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다함께 비행기를타고 시드니 자유와 사랑과 희망이 있는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Pilot 와 스튜어디스들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탑승객이 알아두어야할 필요사항이 적혀있었고 끝에는 명랑하고 유쾌한 여행이되고 행운을 기원하며 뒤로 전달하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참 기분이 좋았다. 시드니에 도착했다. 아침 7시 40분.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는 약 3불 정도라는 집사 람의 말이 기억나는데 짐이 무거워 내려서 어떻게될지 자신이 없어 택시를 탔다.  시드니가 여름이어야하는데 40년만에 처음이상기온이라 무척추웠다. 바람도불고 꼭 초겨울같았다. 호텔에 짐을풀고 우리집 사람을 안내해 주셨던 분께 도착통보를하니 저녁 6시에 데리러 올테 니 쉬고 있으라했다. 김선생님 가족은 반갑게맞아주었고 참 좋은 가정이였다. 15년전에 이민오 신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행복하다 했다. 호텔에 돌아와 집사람에게 안착보고를 했다.

 

영어 62 오식원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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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기 동문:

오늘은 손주들과 축구를 하고 식사후 샤워 하려고 하는데 오선배님 글이 올라와 만사 제쳐놓고 글을 읽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제일 먼저 읽었겠지요. 우리 웹사이트에 이러한 글들이 지속적으로 올라 옴으로 해서 개인의 역사가 되고 동문의 역사가 되며 나아가서 호주에 사는 이민자들의 역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선배님의 글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놓을 수가 없어요. 다른 동문 들 글을 계속 올라오기 바라며 저는 나중에 본사 2년 근무 그리고 호주로 오는 이야기가 연재될 것입니다.

김봉주 동문:

오식원 동문의 호주 상륙 기 애독 했읍니다. 어쩌면 32년 전의 생생한 기억 놀랍습니다. 지면으로 대하니 반가워요. 환절기에 건강에 유념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