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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 부전공, 공부에 전념하다 – 김흥기 동문

 

1966년 3학년이 되었는데 사실 앞이 캄캄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ROTC 도 떨어졌다. 방학 때 고향집에 있는데 경찰서에서 형사가 날 찾아 와서 학교에서 데모 했느냐 물어본다. 한 것을 안 했다고 변명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데모에 앞장서지 못한 것이 좀 부끄러운데 데모 당당하게 했다고 했다.  언제나 데모는 당국의 잘 못을 학생들이 바로 잡겠다고 거리에 나선 것이니 정부가 달가와 할 리가 없다.

데모한 것 때문에 ROTC 에 떨어진 것이다.  공부도 싫다. 장교로 갈 길도 막혔다. 선택의 여지는 하나뿐이다. 군대에 자진 입대 하는 것으로 결정 하고 최대한 빨리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군대는 1966년 3월에 입대 1969년 4월에 제대 하였다. 그래서 여기서는 군 생활은 따로 제목을 가지고 기술하기로 하고 1969년 3학년 기록을 한다.

 

군 복무 기간은 그 당시 34 개월 이였는데 1968년 1 월 김신조 사건 때문에 36 개월로 변경 되어 나는 군 제대가 4월로 미루어 졌다. 하지만 3학년은 3월 초 시작이라 1개월 반 정도가 학교를 다닐 수 없다.  할 수 없이 매형한테 이야기 하여 윗선에서 지시가 가 제대 말년 병사 장기 휴가를 가져 학교는 다니기 시작 하였다.

학교에 가보니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많이 변했다. 그런대로 좀 체계도 잡혀가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앞날을 정 해야 하는 이수 할 학과 과목 선정에서 심사숙고 해야만 하였다. 다행이 부전공 제도가 있어 나는 마인어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부전공으로 상경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즉 취직 전선에서 국내 유수 상경대 학생들과 겨누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공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이 안 되기 때문에 이 또한 게을리 할 수가 없다. 과목을 정해 교실에 들어가 보니 1 2 학년 같이 공부하던 동급생 이진휴가 마인어과 강사가 되어 교단에 섰다.

군 제대하고 복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떤 연유로 해서인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퇴진 운동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저 강사한테 수업을 못 받겠다고 학교에 성토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강사가 약간의 잘 못이 있다 해도 이미 노털로 공부하는 입장에 이 일로 학점에 문제가 있을 가봐 그 강사의 개인적인 부탁도 나에게 있었지만 무사히 마무리 하는데 일조 했다.  이진휴 강사의 강의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도 외대 학교 당국에 감사하는 것은 부전공 제도를 확고히 정해 학생들의 진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외국어는 수단을 될 수 있어도 목적은 될 수 없다. 외국어 잘 해 가지고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통번역 밖에는 할 일이 없다. 확실히 전공이 있어야 한다. 작금에 와서 AI가 통번역을 대신 하여 가장먼저 직장을 잃을 직종이 통번역사라 한다. 학교 당국이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지금부터 있어야 된다고 본다. 외대 학생들은 부전공이 전공인 셈이다.

 

마인어과 64학번 학생과 교수들

 

마인어과 교수진도 1, 2 학년 때와는 달리 학교당국에서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Tjitro Sobono, Kotambunan, 인도네시아 대사관 직원 등 보강 되여 제법 외국어 대학 풍미를 느끼게 한다. 1차로 입학한 30 명은 대부분 진짜 전공과목으로 마인어를 열심히 한다.

이젠  공부한 학생과 안한 학생들의 실력 차는 뚜렷이 나타나는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한 안영호, 정영림이 강사, 교수, 박사, 학장 등 정 코스를 간 동창이다. 

교수가 되겠다고 한 나의 초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국제법 강의 시간에 서울대 법대 학장님이 시간 강사로 국제 법을 가르치셨다. 그분이야 말로 학계에서 존경 받으시는 분인데 당시 열악한 강의실에, 입고 있는 옷은 학생이나 교수도 추위를 막아내기에 역부족 이였고 교실 내 난로불도 까물까물, 추워서 떠시는 그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 나는 교수는 절대로 안 하겠다고 결심 했다.

저렇게 유명한 교수님도 저런데 처음 강사로 출발 하면 당시 버스 값도 안 되는 강사료였다.  대학 3 학년은 열심히 고등학교 시절처럼 공부 하였다.

한 과목강의가 끝나고 다음과목 시간 공백이 있으면 일본어 강의실에 들어갔다. 일본어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국어 말본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다. 그 분 별명이 말대가리인데 너무나도 반가웠다. 영어과목도 도강하는 일이 많았는데 한 과목은 한국인 영어강사가 20 살이 간 넘은 것 같다. 얼굴도 예쁘고 훤한 키에 그녀는 출석만 부르고 한국말은 한 마디 없다 유창한 미국식 발음으로 강의 하는데 학생들이 진지하게 공부한다.

 

방학 때면 소위 특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프로그램을 자세히 보고 연세대 교수님이 강의 하시는 회계학을 공부하기로 정했다. 이때 복식부기를 배워 현대건설시절 외국공사 회계 관리 일을 마탔었고 호주에 와서는 호주 회계감사로부터 감사도 밭는 등 도움이 많이 되었다.

 

3 학년은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놀기도 열심히 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인생 하양곡선은 64년도 입학한 한 해였고 65년은 신나게 놀았으니 인생 바닥이라고는 볼 수 없다. 1969년은 앞으로 목표가 설정 되었으니 또한 이제는 상승 공선에 있는 것이다. 생각하길 고등학교 때 나의 실력이 비록 대학은 떨어 젓지만 나 자신 공부 잘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직전선에서 이들과 경쟁 할 것을 생각 하고는 자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맘을 놓을 수 가 없다.

 

왜냐하면 부전공으로 얼마나 외대에서 배울 수 있을까 전공으로 공부하는 타 학교 학생들과 경쟁 하여야 되는데 이 생각에 상대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들로 부터 강의 노트를 빌려 필기 하고  교재가 무엇인지 알아 구입해서 이를 탐독 한다.

여러 친구들 중 연세대에 다니는 함지호 덕을 많이 받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타 학교 도서관은 외대 옆에 있는 경희대 도서관을 많이 이용 했다. 도서관 출입 시 학생증 보여 달라면 경희대 친구가 강의 중인데 이곳에서 기다리라 해서 왔다 하면 들여보내 준다. 이런 거짓말도 한 두 번이지 여러 번 그리하니 그는 내가 공부 벌래 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감아 준다.

서울 의대에 다니는 도광찬 따라서 의과대 도서관을 많이 이용 했다. 이곳을 자주 가니 외대 교복도 서울대와 비슷하여 내가 서울 의대생인 줄 안다. 이곳에서는 상과 책을 공부 하는 것이 아니고 취직시험에 영어과목이 있기 때문에 TIME 잡지를 보는 것이다. 의대는 원서이기 때문에 거의 영어다 내가 지속적으로 TIME 잡지만 보니까 몇 명이 원서 해석 번역 해 보자고 한다. 자기네도 힘든 의학원서인데 난 나 나름대로 일반 언어로 바꾸어 보면 이해가 빠르다고 한다. 같은 단어라도 일반적으로 쓰는 의미와 의학에서 쓰는 의미가 다르다. 

이곳 의과 대학에서는 외우는 게 많은데 한번은 학생들이 너무 부끄러운 음담패설을 길게 늘어놓는 것을 들었다.  여학생들도 함께하는 자리에서, 알고 보니 많은 분량의 단어를 앞 자 만 골라 나열 하니 그런 이상한 문장이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 하나의 요령 이었다. 

 

3학년이 되었으나 1학년 과목 학점 못 딴 것도 있고 아직 미래가 불투명한 입장에서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다. 학점 못 따 졸업을 제 때 못 할지 졸업하고 취직은 제대로 할는지 가끔 가끔 생각에 잠기곤 했다. 당시에는 몇몇 대학은 돈 주고 졸업장을 살 수 있는 곳도 있다. 공부 못해서 어느 이름도 없는 대학 졸업장 사겠다고 부모님한테 돈 달라 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지금도 가끔 학점 못 따서 애태우는 꿈 취직 못해서 발발 거리는 꿈을 꾼다. 우리 나이는 6. 25 경험에 공산주의자에 시달리는 꿈을 꾸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실로 한심 한 걸로 악몽을 꾸니 마누라 한테 도 이런 꿈꾸었다 이야기도 못한다. 

 

3학년 2학기 후반에 접어드니 당시 유행 하던 대학가 미팅이 많다. 몇 번의 기회는 있었지만 사양하고 친구 이 훈영이가 파트너 구해 놓았으니 숙명여대 축제에 가라고 해서 처음이며 마지막으로 딱 한번 참여 해 본 일이 있다. 가서 잘 먹고 잘 놀고 즐겁게 하루 저녁 까지 소개해준 여학생과 보낸 다음 그 파트너는 나의 집 하고는 반대 방향이라 버스만 태워 주고 헤어 졌는데 다음날 소개 해준 친구한테 많이 혼났다. 그럴 수가 있느냐 좋던 실턴 밤인데 집에까지 바래다주어야지 소개해준 자기를 무시 했다고 야단쳐 나는 그 친구한테 잘 못 했다고 살 살 빌었다.

그 후론 다시는 미팅 기회가 와도 참여를 안했다. 학교에 가니 3년 후배 여학생들이 놀려 먹는다. 일이 잘 되었느냐고. 고교시절 아주 친 했던 이훈영이는 군대 면제 되었고 삼성에 취직해서 끝발 날리는 친구였다. 나는 아직도 사회 나갈 날이  멀었는데 내 입장이 이러고 보니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여러 번 여자를 소개 해 주었다.

한번은 소개 받아 다방에서 한 여자를 만난는데 마주 앉아 몇 마디 이야기 하다가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재미가 없는 눈치다. 생기기는 보통이고 몸매는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갑자기 앞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에 딱 부터 앉아 내 넥타이가 삐뚜러 졌다고 고쳐 준다. 나는 놀래서 얼굴은 빨개지고 됐다 고 만 연발 했다.  번번 히 한번 만나고 구만 두니 이젠 대학 미팅 까지 주선 해 주었던 것이  결과가 또 그렇게 되니 그 다음은 포기 한 모양이다. 훈영이는 삼성 이사 까지 올라갔었는데 이미 고인이 되었다. 날 무던히도 생각해 주었던 친구인데 정말 안 되었다. 내가 호주에 살면서 한번 이 친구 부부를 만났었는데, 그때 그 기억이 지금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1969년의 대학 3 학년 때  고등학교 동창 7명이 구룹이 되여 모이기 시작 했는데 이 모임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지금은 만남의 모임이 아니라 카카오 톡으로 5명이 대화의 모임이다.

연대 상대 함지호의 노력으로 신당동 거주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 했는데 (나는 신당동이 아님),  고려대 공대 우수동, 성균관대 상대 최인환, 서울 의대 도광찬, 동국대  김일영, 외국어대 영어과 박승남 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다. 지호는 지금 미국 LA에서 거주 하고 있으며 교회 그리고 사회봉사의 달인이다. 수동이도 미국 LA 거주하며 세계가 다 자기 집 인양 여행의 달인, 나는 늘 나보다 여행 많이 한 사람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친구 앞에서 손들었다.

서울에 있는 승남이는 우리들 중 제일 먼저 삼성물산에 취직한 귀재, 인환이도 일찍 취직 포항종합제철 초기 멤버 그리고 현재는 핵미사일도 못 미치는 뉴질랜드에 거주, 광찬이는 소아과 의사, 한때 소득세 많이 내는 의사 랭킹에도 올랐을 정도로 인기 있었고  현재도 의사로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카독은 안하지만 해외 친구들이 서울에 가면 함께 자리를 하는 옛 친구,  그리고 일영이는 70년대 초에도 자가용을 굴리는 재력가였었고 미국 뉴욕 근교에 거주 하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60세 때 미국 뉴욕에 가서 이 친구 본 것이 마지막 그리고 세상 뜨기 한달전 전화로 대화를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이 기억된다. 호주 오기 전 이 7명의 친구들은 기회만 되면 무조건 만나는 것이다. 서울 근교 아마도 안 가본 데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대학 3, 4 학년 현대 본사 근무 2 년 계 4년은 아마도 한 달이 멀다 하고 만난 것 갔다.

그러나 내가 72년 말 호주에 오는 관계로 나는 그 만남에서 이탈 할수밖에 없었고 수년전 4 쌍이 하와이 쿠루즈 여행을 갔다 온 후로는 카톡으로 맨날 알콩 달콩은 해도 만나지를 못 했다. 아, 여행자 수동이 부부가 호주에 와 한번 더 만났구나.

 

3학년의 성적은 부전공 과목은 정해진 학점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학점 모자 랄 가봐 과목을 2, 3 개 더 신청 한 것이다. 하지만 마인어 전공과목은 바듯 학점 딸 정도다.

당시 외대는 정부 장학금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부에서  특별히 다양한 여러 나라의 외국어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대 절대적으로 중요 하다고 장학금을 준 것이다. 마인어과에서는 누가 탔는지 기억에 없다.

이태리어과 내 고등학교 친구 정 영웅이가 이 장학금을 탔고 또한 이태리에 유학도 정부 장학금으로 떠났다. 이 친구와 나는 외대 학창시절 청계천 고물 책방을 뒤지면서 철학책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한때 개똥철학을 하겠다고 둘이서 헤매고 다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한 20년 전 이태리에 가서 만났다. 나보다 도 훨신 먼저 해외에 나간 친구인데 한번 도 한국에 다녀 온 일이 없다고 한다. 로마에서 성학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도 하는 지 전화 한번 해 봐야겠다. 

대부부의 외대 학생들은 이와같이 자기 전공언어에 열심히들 공부하는데 나는 전공이 아닌 부전공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외대가 부전공 제도가 없었다면 난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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