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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놀자던 대학 2학년 – 김흥기 동문

 

1965년 재수생으로 이번에도 S대에 지원 했지만 또 떨어졌다.  이젠 갈 길이 막막하다. 내 머리는 뽕구라 라 더 이상 한계가 있구나 하고 나 자신을 알고는 마인어과 전공과목으로 공부나 열심히 해야 한다 하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마음속 깊이 떠난 마인어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당시 6.3 데모로 대한민국 전 대학생이 공부 반 데모 반 이런 시절 이였다.

2학년 첫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4대 공립 출신 중 2명을 포함한 여러 명이 마인어과를 떠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데모하는 날이면 잘 됐다 데모나 하자고 따라다니고 경찰 피해 다니느라 몸만 피곤했다.

2학년 교수진은 정풍실, Parker, Tanner 이라고 하니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생각나는 것은 정풍실교수 뿐이다.

 

제주도 농촌봉사 활동

여름방학이 가까워지는 때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우리 제주도로 농촌 봉사 가자고 한다. 나는 무조건 좋다. 무언가 바꿔져야 하는데 희망도 없이 시간만 가니 뜻 깊은 일이라도 해야 되겠다 하고 참여하기로 했다. 참여하고 보니 몇 명이 가는 것이 아니고 서울시내 대학 전체 에서 지원을 받아 남자 100 여명 여자 50 여명 참가하는 당시 대규모 농촌봉사대다.

그 이름은 푸른행진대.

외대에서는 몇 명이 참가하고 정말 당시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이 다 참여를 했다. 누가 어느 대학에서 처음 주체 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만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는 단체 행동이 있을 때 늘 앞장 서는 학생 이였다. 중학교 3학년 때 4.19를 맞아 그 후 폭풍으로 대한민국 전 중 고등학교에서는 데모가 만연하던 그 시절 늘 앞장섰다.  매년 6.25 행사 땐 당시엔 시가  행진이 유행하였는데 전교생에게 구령 하고 톡 트는 학생 이였다.

하지만 외대 마인어과 희망도 없이 풀 죽어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신세가 된 내가 한스럽지만 이왕 노는 것 기분 좋게 열심히 놀자 하고 모르는 첫 대면인 다른 대학 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푸른행진대가 어떻게 제주도에 가는지 궁금했는데 소문이 들리는데 군용 LST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실천은 안 되였고 기차로 부산 그리고 배로 제주도에 가는 것이다. 1965년 7월 15 일 06;00 서울 발 부산행 열차다.  여름 가장 무더위에 시달리는 7월 중순 하루 온 종일 걸리는 서울 – 부산 12 시간 오후 6;00 에 도착 하였다. 처음 보는 부산 풍경에  친구들과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150명이 어디서 자는 지도 모르고 따라만 다니는 것인데 부산 남성여고 강당에서 잔다고 한다.

몇 년 전 시드니 동문회에 처음 참여한 여자 동문 후배가 남성여고 출신 이라 해서 후배 고등학교 강당에서 잔 일이 있다 하니 잘 믿기지가 않는 모양 이였다.  어디서 자는 것도 가는 길에서 알았다.

가보니 미리 온 학생들이 열심히 강당 의자를 한군데로 모아 바리케이트를 높이 쌓고 있다. 나도 같이 이 일을 거두고 나니 훌륭한 장벽이 되었다. 한쪽은 남학생 한쪽은 여학생이 자는데 한 여름 밤이니 덮을 것도 필요 입고 온 그대로 자는 것이다.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하라 하니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다음날은 오후 6시에 제주도로 가는 배에 타야 된다고 하여 하루 온종일 자유시간이다.

떠나기 전 마인어과 학생 들 에게 부산에 사는 학생이 있을까 하고 물어보니 남학생은 없고 여학생 한명이 있다. 강신자양이 자기가 부산에 산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여차여차 해서 부산에 가는데 만나도 되느냐 하고 물으니 좋다 하였다.

당시에는 전화 있는 집이 드물 때였고 부유층이 전화가 있었을 때다. 편지가 소식 전달에 가장 주요한 시절 이였다.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언제 어디로 할 가 강 양에게  물어보니 주소를 적어 주고 약도를 그려 준다. 아마 공중전화도 흔치 안는 시기라 전화가 있으면서도 주소를 준 것 같다.  무더운 7월 부산에서 여고 강당에서 하룻밤은 친구들과 늦게까지 노느라 다음날 늦은 아침 옷은 그대로고 바로 세수나 하고는 아침은 길가다 호빵 하나 먹었는지 부산 시내를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 듯 영도 다리를 넘어가 왼쪽으로 돌아 찾아가니 규모가 당시로선 큰 철공소가 나왔다. 이곳이 강 양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다. 강 양 부모님이 반가이 맞아 주시고 당시로선 귀한 손님에 하얀 쌀밥을 대접하는 시기였는데 그때 하얀 쌀밥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맛있게 먹던 점심만 생각나고 오후에 어떻게 어디서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6시에 제주에 가는 부두에 나오라 하여 가 보니 배는 그리 크지도 않은데 짐이 배 크기보다 도 많은 것 갔고 사람에 치어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배 이름은 도라지 호, 당시엔 관광으로 제주도 가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고 주로 상인들이라 배는 짐 위주 이고 자는 곳은 다다미 방으로 하나의 큰 홀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엉덩이만 부치고 구부리고 자는 것이다.

이날은 평소 상인들과 짐 에다 추가로 150여명의 학생들이 함께 승선 했으니 세월 호 짝이 안 난 것이 이상 할 정도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니 갑판 위에 빽빽이 서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가늠하기 힘 들 정도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안에는 도저히 답답해서 못 있어 갑판에 올라와 멀리 저물어 가는 부산 시내를 보며 마냥 즐겁기 만 한 시간 이였다.

처음에 고요한 바다 그러나 낙동강 하류를 벗어나면서 파도는 치고 배는 출렁이는 정도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배 멀미 하는지 비실 비실들 하고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니 학생들이 한꺼번에 내려가느라 아수라장이였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 많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밑으로 내려가고 30여명이 배 멀미로 거의 인사불성에 꼼짝도 못하고 있다. 아니 꼼작 못 하는 것이 아니고 엄청나게 출렁이는 배에 흔들려 꿈틀 거리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 여학생 이고 남학생은 몇 명 안 되였다. 그 때 나를 포함한 3, 4명이 학생들을 아래층 방으로 옮기는 일이 자연적으로 부과 된 임무이다. 난생 처음 기사도를 발휘하게 되었다. 비는 점점 더 오고 강한 바람에 내 자신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건강한 체질에 배 멀미는 전혀 없었다.  여학생들을 좀 가벼우면 어께에 메고 내려가고 무거우면 기사도들이 여학생을 내 등에 업혀주면 나는 비에 젖고 정신 없는 여학생들을 업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다.  어찌 무거운지 비실비실 내려가 다다미 방에  내동댕이 치는 것이다. 여학생들을 다 처리하고 남은 남학생들은 발로 차서 꿈틀 거리면 끌고 계단까지 가서 밑에서 받고 위에서 밀어 내려 보낸다.

비는 더욱 힘차게 오고 기진맥진 다 마치고 나니 시간은 몇 시 인지도 모르고 나도 밑으로 내려갔으나 너무 비좁아 남의 발 밑에 웅크리고 잠 잘 자리가 없어 앉아 있으니 잠이 쏟아진다. 

누구한테 쓰러진 지도 모르고 아침이 되여 갑판으로 올라가니 제주의 아침은 어제 밤의 풍랑은 언제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기분 좋게 부는 바닷바람에 아주 맑은 날씨, 어제 밤의 일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다. 기분이 상쾌하다.  함께 학생들이 모였을 때 내 등에 업혀 내려온 사람 손들 라 하니 한 명도 없다. 비행기로 제주에 가면 한 시간 남짓이면 될 것을 만 이틀 걸려 제주에 도착 한 것이다.

 

학생들이 많아 몇 개 구룹 으로 나누어 다른 마을로 이동 한다. 버스를 타고 중문면 대포리 이장 집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유명한 중문면에 (지금은 중문동)  1 주일 터전을 잡았는지 신기하다. 그곳은 3단 폭포인 천제연 폭포가 있고 중문 해수욕장, 멀리 안가서 협재종룡굴 안덕계곡 등 유명 관광지가 즐비 한 곳이다. 이장은 친척집에서 기거하고 우리 일행 남자 5 명 여자 4 명은 방을 배정 받아 잣다.

문제는 제주도 날씨, 한여름의 무더위 습도는 팔에 손가락으로 누르면 물이 줄줄 흘러 떨어진다. 거기에 제주도 모기는 모포도 뚫는다. 이틀 밤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샤워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한 남녀 동료들의 몰골이란 참 보기 딱하다. 나는 위로 누님이 네 명이다. 사실 물이 얼마만큼 끌어야 커피를 타는지도 몰랐었다.

이정도니 옷은 몇 개 가지고 왔지만 세탁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1965년도 제주도 시골 마을에 세탁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마을에서 첫째 날은 우선 가라 입고 입었던 옷은 밖에 어디엔가 숨겨 놓고 저녁식사 후에 바닷가에 나가 몇몇 여학생들과 어울린다. 배에서 용감한 청년의 무용담도 들려 주고 하니 자연히 좀 친해진다. 그 중 한 여학생이 나한테 업혔던 학생 이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까진 자신에 충만한 거만한 학생 이였다. 대학에 들어와 자신이 없는 자가 되고 보니 당시 몸무게는 지금보다도 10 키로 적었고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옷은 별로고 누가 봐도 여학생들이 관심이 가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해 보니 여학생들과 친하게 이야기 해 본 일이 없는 것 갔다. 그런데 이날 밤 만은 양 옆에 두 여자를 놓고 신나게 무용담이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왕따 당하는 학생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못 살게 굴던 이야기 등을 나도 모르게 즐겁게 떠들어 대니 그들은 들어주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셋이서 캄캄한 제주도 첫 밤을 시간 가는 줄 도 모르고 풀밭 언덕에서 보내며 아주 늦은 시간 숙소로 오는 도중 좀 더 가까웠던 여학생에게 세탁을 부탁하니 쾌히 응답해 주어 이 큰 일을 해결 했다.

당시 주체 측 에서 많은 상비약들을 구해 와서 여학생들은 의료봉사, 남학생들은 마을 길 보수가 주고 기타 닥치는 대로 마을 이장이 하라 하면 하는 힘센 청년 들이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노동은 모르고 자란 학생들이라 내가 보면 이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힘든 일은 내가 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식사 때가 되면 여학생들은 자기네는 편하게 의료 봉사인데 우리들은 피로에 지쳐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고 안쓰러운지 모두들 친절히 대해 준다.

동료들이 농촌 봉사는 원래 고생을 각오하고 온지라 하는 일들이 힘들어도 만족하는 것 같다. 제주도는 돼지를 어디에 키우는지 알고 온 학생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커다란 사각형으로 콩크리트 벽을 만들고 콩크리트 위에 통나무로 걸치고 지붕과 옆은 막대기로 막아 지푸라기로 엉성하게 두른다. 문제는 화장실이 돼지우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통나무 사이를 좀 벌려놓고 그 사이에 널빤지를 아슬 아슬 하게 놓아 그 위에서 일을 보는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일찍 일어나 컴컴한 시골 마을에 화장실 찾아 갔더니 돼지 두 마리가 신난다고 날 마지 한다. 이미 알고 온 일이라 돼지들과 이야기 하며 볼 일 보았다. 물론 내가 내려 보낸 것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날이 훤히 밝고 어느 정도 시간이 갔는데 한 여학생이 비명을 질러 모두들 밖으로 나와 비명 소리 들린 곳으로 갔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남자들은 못 오게 한다. 여학생 셋이서 작대기를 구해 돼지들을 한쪽으로 몰아 동료가 일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때 사진을 못 찍어 두었던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그런 일이 있곤 언제든지 여자 네 명이 뒷간에 가는 것이다.

하루는 목이 말라 일하다 집으로 오는데 한 여 학생이 날 따라온다. 자기가 급하니 돼지를 쫒아 달라 한다. 의료 활동 중이라 동료들을 다 끌고 화장실 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죽 급했으면 남자한테 부탁 하랴 바로 옆에서 다 보이는데 수치심 보다는 돼지가 자기 것 먹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한 우리 안에서 그 여학생은 치마만 앞을 가리고 일을 보고 나는 열심히 돼지들을 옆쪽으로 쫒아 내는 것이다.  그 학생은 E 대 생으로 키가 크고 얼굴이 미인 형인데 공부도 잘한다고 같이 온 친구가 말해 준다. 나는  아니 남자들은 뛰어나게 예쁜 여자한테는 말을 못 건다. 말 걸었다 한방에 차이지나 않을까 미리 검먹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서 인지는 몰라도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고 서울에 올라와 같이 갔던 학생들과 몇 번 모였는데 그때마다 그 이야기 하려면 내 어께를 때리곤 했다.

 

이때 중문리 지금은 중문동 농촌봉사활동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는 변화되는 event 이였다. 처음으로 여자와 친구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은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공부만 하느라 여자가 보이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 주눅 들어 인생 하양곡선에서 여자가 보일 리 없다. 이번 농촌활동에 모든 것 다 잊고 오랜만에 육체노동에 쉬는 시간에는 같은 집에서 남녀 여러 명이 히히덕거리면서 오만 이야기들을 하니 여자가 남자와 다르다는 것도 이때 깨달았다. 지금은 초등학교 때부터 안다는데 늦어도 보통 늦은 게 아니다. 일하는 것은 오전 일찍 시작하고 오후 3시쯤이면 쉬는 시간이다. 그래서 주변 관광지도 여러 군데 가보고 육지와 다른 제주도 환경 기후 바다 색깔 등 만끽한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골프장 콘도 호텔 박물관 각종 시설 등 그 옛날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 후 1972년의 신혼여행과 사업관계로 두 번 더 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달라져 가고 지금은 완전 딴 세상이 된 것이다. 근자에 제주도 갔다 온 분 들 말에 의하면 제주도 가 제주도 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 날은 주민들과 중문 해수욕장에 나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해녀들이 성게 해삼 전복 등을 잡아 그 자리에서 요리해 주시던 그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 날 큰 일 날 번 한 사고가 발생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인 장헌식이 수영을 아주 잘 하는데 그날 자신을 너무 믿고 먼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기운이 빠져 나오지를 못 하는 것 이였다. 동리 분들과 함께 바듯 해안으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친구는 현지 도착 이틀째부터 나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동내 아줌마가 사위 삼겠다고 계속 시간만 나면 따라다니면서 이야기하길 딸을 보여 주겠다고 한단다.  하도 성화 해 한번 보았다고 한다. 예쁘더냐 하니 그래 라고 대답하면서 말이 되느냐고 한다. 이 친구는 나와 달리 풍채가 좋고 아주 선 해 보이는 친구다. 그 아주머니가 서울 주소를 대라 하여 거짓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모든 시골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 와야 사람 구실한다고 하던 때라 그 아주머니가  이해가 갔다.

중문 해수욕장에서는 해산물로 배를 채우고 수영하고 나서  각종 경기 대회를 하였다. 놀이 기구도 없어 당시에 제일 많이 하는 기마경주, 기마싸움, 팔씨름, 씨름, 모래사장 달리기, 리렐이, 발란스 발거리 등 하고 놀 일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집 팀과 옆 마을에 있는 다른 구룹 팀이 경기를 하였다. 내가 들어간 팀은 언제나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팀이 8개 종목 중 6 종목에서 이긴 기억이 난다. 오늘 낮으로 대포리 봉사활동은 끝나고 다음은 제주 관광이다. 모두들 고생 끝에 낙이라고 맘껏 제주 풍경을 머릿속에 담는다.

천제연, 협제종료굴 안덕계곡 정방폭포 서귀포 한라산 횡단도로 합덕흑사장 금융사굴 등 거의 이름 있는 곳은 다 둘러 본 것 같다. 마지막 날 오후에 제주시내 어느 초등학교에서 모였다. 그날 밤을 이 학교에서 자는데 잠이 금방 올 리가 없다.  

밖이 요란하고 불빛이 훤해 나가보니 모닥불 옆에 학생들이 웅크리고 모여 앉아 있다. 누구의 선창인지는 몰라도 당시 캠프에 유행하던 노래들이 연 이어 나온다. 나는 노래를 할 줄 모르나 따라 하는 것은 열심히 해 모닥불이 꺼질 때 까지 함께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한곡이 호주에 와서 라디오에서 자주 들린다. 워칭 마틸라 라는 노래로 지금도 어디서 들리면 1965년 제주에서 모닥불 생각이 나곤 한다. 이날 밤의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모닥불 체험은 내 일생 처음이며 마지막인 것 같다.

 

2학년 여름방학 2번째 다른 구룹과 어울리다.

제주도 농촌봉사 활동 마치고 고향에 와서 한 일주일인가 있으니 서울 어느 교회에서 농촌봉사 및 선교활동으로 남녀 대학생 한명이 리더이고 고등학생들이 왔다. 팀 멤버는 주로 여고생들이고 남자 고등학생은 두 명 그중 한 학생이 고등학교 후배라 내가 자연 안내역을 맡게 되었다. 우리 고향집 근처엔 지금은 보령 댐으로 흔적조차 없어 졌지만 매바위 라는 곳이 있다.

자연이 아름답고 맑은 물에 바위가 근처에서는 높고 매 같이 생겼다 하여 매바위 라고 선조들이 이름 지은 것 같다. 이곳으로  안내하여 하루를 즐겁게 해 주는 일도 하고 어머니 몰래 오이를 따서 그 구룹 에게 주면 모두들 즐거워했다. 이렇게 여름방학을 지내다 보니 어느 듯 가을 학기가 시작 되여 서울에 올라와 이 교회를 몇 번 간 일이 있다.

모두들 반가이 맞아주고 후배가 주선하여 우이동 골짜기로 두 번인가  놀러가 당시 유행 하던 튀위스트도 추고 완전 놀자 판으로 흘러가던 때이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사진첩에 여러 장 있는데 이런 것을 보관하고 있느냐고 와이프는 핀잔을 주나 없애지는 안는다. 다 늙어서 보니 그 옛날 이런 때도 있었나 하고 웃음이 절로 난다.

이 외에도 구룹으로 주말이 빼 놓지 않고 서울 근교 산행을 많이도 했다. 청평으로 낚시도 여러 번 여하튼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는지는 안중에 없다.  

2학기가 되어 수강 신청을 하였으나 공부 할 마음은 전혀 없다. 1학년 때 학점을 다 이수 못해 그래도 2학년에는 주어진 과목은 성적이 꼴지라도 학점은 따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은 되었지만 그게 만만치가 않다.

2학년 2학기가 되면 군대 문제가 대두 된다. 졸업하고 군에 갈 사람. 장교로 갈 사람 자진입대 할 사람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을 잡아야 한다. 일단  ROTC 원서 제출을 할 가 말 가 하다가 해 놓고 신체검사 날이 다가 올 무렵 강의 도중 뒷문이 열리여 보니 제주도에 가치 봉사활동 하던 친구 2 명이 왔다.

제주도에서 만난 친구들인데 그들이 보기엔 내가 놀기만 좋아 하는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내일 설악산 가자고 했다. 난 못 간다 하니 왜냐고 다구 친다. 그들은 내가 완전 놀자 주의인데 안 간다 하니 이상한 것이다. 신체검사가 있고 돈도 없다고 대답하니 자기네도 신체검사는 2차로 기회 있으니 그때 하면 된다고 하고 돈은 필요 없다고 했다.

너희 아버지가 댈 거냐 하니 그것도 아니다 이다. 당시 유행 하던 무전여행을 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해외 배낭여행이 유행 이지만 무전여행은 한번 도 해 본 일이 없어 애라 모르겠다. 공부도 하기 싫고 2학년은 놀자 로 한 해를 보내기로 했다. 내가 요즘 대학생이라면 아마도 세계무전여행을 했을 것이다. 장기간 동 안 일정 잡아 비용은 무슨 일을 하던 벌어가면서 다녔을 것이다.  

 

설악산 무전여행

 1965년 11월 5 일 04; 30 새벽 청량리에서 홍천 가는 버스를 승차권 없이 탔다. 맨 뒤 자석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차장 아가씨가 표를 사라 한다. 다들 눈치만 본다. 서로 표를 사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돈 가진 친구는 아무도 없다. 모임만 있으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맨 뒤에 있다가 나도 모르게 리더 역할을 하게 된다. 친구들은 내가 돈 가진 줄 알고 나만 쳐다본다. 너희들 왜 날 보느냐 해도 아무 말도 아니한다.

나는 멋 적어서 차장 아가씨 쳐다보고는 머릿결이 너무나 예쁘다. 예쁘다 를 계속하니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나를 따라 한다. 다음 정류장에서 몇 명이 탄다. 손님마다 돈을 받고 차장 아가씨는 우리에게 차표 사라 한다. 이번에 내가 우리 보다 나이 어린 차장이었지만  누나 얼굴이 정말 예쁘다. 예쁘다 하니 친구들이 앵무새 가치 따라서  누나 얼굴이 너무나 예쁘다 예쁘다 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또 한 정거장 다음은 어느 부분을 예쁘다 라고 하나 그렇다고 가슴이 예쁘다 했다간 버스에서 쫓겨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가 예쁘다 라고 했다. 그다음은 팔, 코, 귀 눈, 입 이런 식 으로 홍천 까지 가는 것이다. 운전수 아저씨는 힘든 일에 차장이 늘 기진맥진하고 얼굴에 지친 모습이 늘 보이는 것인데 오늘은 마냥 즐겁게 웃기만 하니 미리부터 눈치를 차린 것 같다. 맨 뒤에 앉아 있는 녀석들이 강짜로 무임승차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내양을 기쁘게 해 주는 가 싶었는지 자기는 관계 안 하겠다는 눈치다.

홍천에는 아침 10시에 도착하였고 내리면서 즐겁게 그 안내양 하고 헤어지고는 우리는 백담사를 찾아 가는 것이다. 11시 30분에 용대리라는 곳에서 첫 항고 밥을 먹게 되었다.

항고라는 것은 당시 군대 안 갔던 시기라 몰랐었는데 한 친구가 어떻게 이것을 가져와 밥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소화도 되기 전 우리는 곧장 올라가 백담사에는 떠난 당일 오후 5시에 도착 하였다. 백담사 구경도 잠시 한시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젠 내설악의 경치를 만끽 해 가며 어둑어둑 할 무렵 산 중턱에 있는 어느 민가에 도착 하였다.

하루 밤 재워 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곳간으로 쓰는 빈방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밖에서 자는 것 보다는 훨씬 좋기 때문에 곳간에서 자기로 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쌀을 씻고 일어서는데 쌀 씻다 흘린 쌀 몇 알을 아주머니가 하나하나 줍고 있다. 얼마나 쌀이 귀하면 흙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을 까 생각하고는 우리도 얼마 안 되는 쌀을 좀 드렸다.   빈 곳간 방에는 천정에 옥수수가 주렁주렁 꽉 차 있다. 옆에는 감자 자루가 몇 개 있고 이것이 이 가정의 겨울날이 식량인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좀 산책을 하려 나가는데 아주머니가 옥수수와 감자를 주신다.

아침 일찍 옥수수와 감자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가파른 내설악 산길을 오른다. 11월이라 산에는 나뭇잎 풀잎 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오히려 숲이 우거진 여름보다 산행하기에 좋았다. 우리 중 한명이 등산 경험이 좀 있어 앞장 서 갔는데 분홍색 리본으로 나무 가지에 매여 있어 이 분홍색 리본을 찾는 일이 앞서 가는 우리 등반대 대장의 역할이다.

이 내 설악산 길을 그 후 한번 도 더 가본 일이 없어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보이는 길이 없었다. 길이 있다 해도 비 한번 많이 오면 없어지는 것이다. 쌍용 폭포에는 6일 12시에 도착 하였고  봉정암  6일 오후 3시 30분에 도착 된 것으로 앨범 사진첩에 적혀 있다.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한 것 같은데 지금 52년 이란 세월이 지난 시점 이라 자세한 생각이 안 난다. 11월 7일은 설악산 청봉을 목표로 올라가는 것이다.

점심은 또 가지고 온 옥수수와 감자 올라가면서 해결 하고 정상인 듯한 봉우리를 가면 청봉 표시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소청봉 이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첩에 소청봉 11월 7일 11;30 으로 적혀 있다.    봉우리에 올라가면 저쪽 봉우리가 더 높아 보여 가면 표시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가청봉 (오후 1시 30분). 여러 봉우리를 찾아 헤매다  결국 대청봉 1708 미터 정상에 오른 것이다.

지금 대청봉을 검색해보면 1701 미터로 나온다. 그간 비바람에 깎겨서 그런지 새로운 장비로 측량해서 그런지 여하튼 높이가 다르다.  이 때 시간은 오후 2 시.  이 대청봉 표시는 원기소 만드는 제약회사가 설치 한 모양이다. 푯말에 상표가 있다. 지금이야 해발 수천 미터를 등산 애호가는 다들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나로서는 도봉산도 높게 보이던 때다.

    

올라왔으니 이젠 내려가야 한다.

당일 날 외설악 관광지인 신흥사 까진 시간적으로 오늘 내려 갈 수 없다. 여하튼 속도를 내고 내려가는데 등산은 오르는 것 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 얼마나 많은 사고가 있었으면 죽음의 계곡이란 지명이 되였을까. 이 죽음의 계곡을 우측으로 보며 계곡 밑을 내려가면서 날은 어두컴컴한데 갑자기 출렁 다리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줄로 계곡위에 매여 놓고 널빤지를 깔아 놓은 것이다. 너무나 보수를 하지 안 하고 오래 되여 떨어져 나건 곳이 많고 자칫하면 그 걸로 끝이 나는 일 이라 이때처럼 공포가 있었던 일은 없었다. 걸쳐있는 나무판자는 썩어 발을 디디면 우두둑 하고 소리 나기도 하고 어느 것은 부러 지고 간이 이럴 때 콩알만 하다고 하는 것 같다. 가능한 한 발을 옆줄과 판자와 함께 밟아 가며 한 발작 한 발작 띠는 것이다. 

무사히 다섯 명이 건너오니 이미 날은 어둠이 깔렸다. 경사가 급경사라 위험은 계속 되었지만 멈출 수가 없다.  최대한 빨리 걸음을 재촉하여 계곡 즉 죽음의 계곡 밑에 까지 왔다.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일단 저녁 밥을 해 먹은 다음 각자 바위 밑을 찾아 가서 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준비성이 많아 배낭 모포 등을 등에 지고 카메라 맨 역할을 하고 그것도 내 얼굴이 들어가야 하니 당시 아주 무거운 카메라 삼발이 등 다른 친구들 보다  두 배 많은 짐을 지고 다녔다. 너무 고단 해 잠이 푹 들었었고 날은 어두운데 궁둥이가 흠뻑 젖어 잠이 깨였다.

알고 보니 한 친구가 내 다음으로 같은 바위 밑에 자다가 밤새 비가 와 옷이 흠뻑 젖어 일찍 깨여 난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쿨 쿨 자고 있으니 그는 심술이 나 시내 물이 나한테 오도록 물길을 손으로 파서 돌려놓은 것이다.

화가 낫지만 화 낼 시간이 없다. 어제 밤에는 물이 별로 없었는데 시내물이 흐르고 있다. 빨리 서둘러 모두 들 깨어 나게 하고 아침 식사는 생각 도 못하고 짐 꾸려 내려오는 것이다. 대청봉 까지는 자기 딴에는 리더라고 잘 안내하고 기운도 센 친구인데 내려오면서 부터는 날 보고 앞장서라고 한다.

즉 앞서 가는 사람이 대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른 새벽 어둠이 거치면서 앞산을 올려다  보니 그 경치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좋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보아도 다 기막힌 경치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 옛날 선인들의 산수화가가 이런 것을 그렸구나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고개를 뒤로 90 도로 꺾어 올려 보는데 폭포의 위 자락이 보이 질 않는다. 밤새 비가와 온 산이 다 폭포가 된 느낌이다.  내가 산수화를 그리는 화가라면 이 날 본  광경을 그려 보겠다.  경치 감상도 일순 간 저 물이 다 내려오면 우리는 문제가 발생 한다. 아니 이미 문제는 발생하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야 하며 길이 없어지고 계곡을 건너 한 참 가다 보면 또 계곡 물을 건너야 되고 나는 앞장 서 가며 가장 안전 한 곳으로 리드해야 한다. 몇 번이나 계곡을 건넌 는 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양 폭포 오련 폭포를 지나 비선 대 계곡 까지 다달은 것이다. 일대 대 사건 신문 지상에 올라올 번한 사건이 벌어진 곳은  비선 대 계곡과 저항 령 계곡 이 합쳐 저 징검다리가 강으로 변한 곳이다.

갑자기 건너야 할 강이 앞을 가로 막는 것이다. 지금 까지 내가 앞 장 서 왔으니 당연 내가 앞장서 강을 건너야 했다. 한 20여 미터 갔을 때  살펴보니 도저히 자신이 없다. 망설이다 돌아와 안 된다. 너무 위험 하다. 하고 모두들 망서리고 있는데 강 건너 편에서 어느 어르신이 밧줄을 준비 해 가지고 그분이 반대편에 올 수 있는 곳 까지 오고 내가 이쪽에서 다시 강으로 들어가 그 분이 던진 밧줄을 잡아 뭍에 돌아 왔다.

내려오면서 모자를 처음부터 안 쓰고 온 친구가 나의 외대 교모를 자기가 쓰겠다고 하여 주었었는데 지금 모자를 쓴 그가 내가 머뭇머뭇 하는 것이 답답했던지 자기가 먼저 강을 건너겠다고 한다.

밧줄을 몸에 감아야만 하는데 손에 둘둘 말아 잡고 그냥 징검다리 위로 나간다. 내가 안 된다 아무리 소리쳐도 물살 소리에 듣는지 못 듣는지 앞으로 나아간다. 중간쯤 갔을 때 그는 물살이 너무 강 해  넘어 지면서 밧줄은 손에서 풀리고 둥둥 유유히 떠내려간다. 나의 외대 교모는 아마도 태평양으로 흘러갔겠지. 그 후 교모를 다시 구입하지 않았다. 

원래  친구는 미남형에 항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여자들의 선망이 되는 놈인데 떠내려가면서 우릴 보고 씨익 웃는 것 같다. 이젠 나머지 네 명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면서 한 친구의 생사를 모르고 어찌 할지를 모른다.

밧줄을 던진 그 분이 우리 보고 손짓으로 앞의 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을 넘어 내려오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물살에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아 여러 번 되풀이해서야 알 아 듣고 그 산을 오르기 시작 했다. 우린 큰 고생을 해 보지도 안 했었고 기껏 도봉산 우이동이나 올랐던 것이라 우리는 너무 너무 힘들어 한 발자국 띄고 서고를 번복한다. 아침밥도 못 먹었었고 친구의 생사도 모르고 다리는 후들 거리고 한 발작 한 발작이 천근이다. 

산 중턱에 올라가니 눈이 와서 산 타기가 더욱 힘들어 진다. 비선 대 에서 마주 보는 산으로 남산 정도도 아니 되는 높이인데 그 날은 어찌 힘이 그리 드는지 난생 처음 겪는 고생이다. 난 그래도 앞에 가면서  나머지 세 명이 못 따라와 쉬어 갈 수 있어 다행인데 다들 빨리 가자고 소리치는 내가 야속한 모양이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는 지 관심도 없고 그저 우리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민가를 찾았다. 당시 기념품 가게를 하는 분 들이 뒤에 집을 짓고 살아 집이 두세 채 있었던 것 같다.  물에 떠내려간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궁금하여 혹시 무슨 사고소식 들은 일 없으신 지 물어보니 방문을 열어 보여 준다.

그 곳에 물에 떠내려 간 친구가 발가벗고 모포를 뒤집어쓰고 우릴 보고 웃는다. 모두들 기뻐 오랜만에 마음 것 웃을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니 한 참은 정신이 있었는데 폭포에 떨어지면서 정신이 없어졌다 한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는데 머리가 아픈 것을 느끼고 고개를 위로 해 보니  밧줄 던져 주었던 그  분이 막대기를 드밀어 이를  붙잡고 뭍으로 나왔다고 한다. 즉 폭포에서 떨어지면서 물이 돌아 몸도 가치 옆으로 흘러 물가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결국 폭포와  그 아저씨가 살려 낸 것이다. 이분은 본업이 약초 캐는 분으로서 사고 많은 지역이라 그날도 약초 캐려고 산으로 오르려 할 때 우리 일행이 강 건너 편에 있는 것을 보고 늘 준비된 밧줄을 가져 온 것이라 한다.

그 분과 기념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다. 우리가 그 분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후에 했어야 되는데 가끔 가끔 생각나는 때가 많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감사 할 때 꼭 이를 표현하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때를 노치면 후회하게 된다.

 

 

사고가 난 날은 이미 시간 적으로 서울로 출발이 늦어 버린 시간이라 설악산 관광지 몇 군데를 구경하기로 했다. 사진첩을 보니 비로봉 비선 대 비선교구경이 11월 8일 9;30 분으로 적혀 있다. 그동안 지쳤던 몸을 집 떠난 지 처음으로 따뜻한 방에서 자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러나 보니 눈이 온 천지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나무 가지 하나하나에 눈꽃이 피어난 것처럼 아름답기 한이 없다. 도시생활을 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눈 구경하기가 힘들다. 그때 사진에 담아 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아침 일찍 서둘러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가야 한다. 친구들 끼리 주머니에 있는 돈 내 놓으라 하니 돈이 있을 턱이 없다. 이 곳 까지 버스도 돈 없이 왔는데 갈 때 돈이 생겨 날 리 만무하다. 바듯 동전들을 모아 5명 입장권을 사고 기차역 밖으로 나갔다. 역무원이 이놈들 다섯 명이 서울 가는 것 분명한데 표는 없고 역 입장권이라 우리들 에게 눈을 째려 보았지만 법적으로 하등 하자가 없다. 그 표가 무슨 표가 되었든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 이였다.

기차에 올라 역무원이 앉는 자리를 찾아 가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된다고 우리는 표 검사 하는 역무원옆 자리에 앉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친구에게 너는 복이 많아 죽을 놈이 살아났으니 그리고 올 땐 내가 버스비 안내고 해결 했으니 갈 때는 네가 기차 비를  해결 하라 하였다. 동전 모아 입장권 사고 남은 돈으로 소주 2병을 샀다.

이 친구는 잘 생기고 항시 웃으며 말도 잘 한다. 술도 좋아하고 하지만 우리들은 술 한 모금 못 마시고 천천히 한잔 식 역무원에 딸아 준다. 처음에는 근무 중 이라 안 된다고 한다. 여기 누가 말 할 사람 있느냐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고 우리들은 맞장구를 친다. 청량리 올 때 까지 술 두병을 그 에게만 먹이고 우리들은 한 모금도 못 마셨다.

기차가 서울에 접어 들 때 청량리는 큰 역이라 빠져 나갈 구멍이 없으니 한역 미리 내려 역 반대편 쪽 개구멍을 찾아 가라고 그 역무원은 가리켜 주었다. 역전 개구멍이야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주말이면 하숙집에서 집에 오느라 기차를 타면 개구멍으로 빠져 나오는 숙달 된 솜씨라 잘 안내하여 무사히 역을 빠져 나왔다.

각자 시내 버스표로 집에 무사히 갔다. 이렇게 해서 무전여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한번 쯤 해 보도록 권유 했다.

 

혹시 기차 철로가 Z 자로 되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당시 기차가 고개는 넘어야 되는데 정부에서 굴을 뚫을 돈은 없고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Z 자 형식으로 지그재그로 해서 올라가는 것인데 기차가 가다가 슨다. 창밖을 보니 철로가 아주 가까이 보인다. 이 산골작에 또 다른 철로가 있을 리 없어 이상 하다 하는데 좀 있다가 반대 방향으로 간다. 기관차가 객실을 끌다가 역무원이 노선 달리하면 미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몇 번 지나니 기차가 상당히 산마루에 올라와 있다. 내 손주들이 이 기차를 타면 신난다고 할 것 같다.

내가 현대건설 본사 근무 시 그러니까 1971년 현대라는 월간 회사 잡지 3 월 호에 이 설악산 기행문이 실렸다. 지금 생각하기에 제목이 “멋있게 고생 하자던 설악산 무전여행” 이라 기억된다.

2학년 한 해 결산을 해 보니 계획대로 놀자 주의 에서는 100점을 받을 만하다. 내 일생 중 그때 같이 많이 즐겁게 놀아 본 일이 없다. 하지만 공부는 성적은 별로 이지만 학점은 이수 한 것이다. 그러나 1학년 때 못 한 것이 있어 늘 가슴 한쪽에 남아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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