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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웃던 나의 대학생활 – 김흥기

 

변화의 대학 1학년

1964년은 나의 생에 있어서 대 변화의 해이였다. 나의 학번이 64학번에 전공은 마인어과 즉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이 이름은 외대출신도 그런 학과가 있었는 가라고 할 정도로 생소한 학과이다. 아마도 이렇게 긴 이름의 학과는 외대 뿐 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 도 없을 것이다.

나는 외국어대학 인도네시아어과 1회 입학생이다. 1965년 중국인이 주로 거주한 싱가폴이 말레지아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하고 말레지아는 자기네 국어를 말레이어로 삼아 인도네시아어와 같기 때문에 입학 다음해에 학과 명이 말레지아라는 단어가 더 들어 갔다. 이 두 나라의 이름이 길어 우리 학과는 설명이 없이는 누구도 알아 들 을 수 없는  마인어과로 정해진 것이다.

외국어대학에서 1차로 30명 뽑고 2차와 3차, 24명 추가로 뽑아 계 54명이 64 학번이다. 그러니까 이 학과에 들어오고 싶은 학생은 전국적으로 54명이란 이야기로  당시 한국에 고등학교 졸업생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소수만이 인도네시아어과에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졸업한 인원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40명 안쪽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이름도 생소한 학과가 졸업 후 30년이 흐른 다음 사회 진출을 보면 외대에서 어느 학과 보다 도 탁월한 학과가 되었으며 글 후반에 정리 하려 한다. 이름도 생소한 1964년도와 달리 지금은 외국어 대학교에서 영어과와 대등한 유명세를 타고 있고 장학금도 다른 어느 학과에 비해서 수혜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현재 마인어과에 입학  시험 수준이 너무 높아  들어가기 매우 힘든 학과로 알려졌으며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외대 동문이 한 200 여명에 마인어과 출신이 160 여명 이라 한다. 자카르타에서는 외대 동문회가 Short Gun golf 대회를 여는데 원하는 동문을 다 참여를 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용산고등하교 학생인 나로서는  당시 4대 공립학교로 (경기 서울 용산 경복) 자부심이 대단한 시절 이였다. 화학 과목은 500여명 학생 중 일등도 했고 서울시 고등학교 수학 과목 경연대회에 학교 대표 몇 명에 뽑혀 출전 한 일도 있다.

이런 내가 S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그해 150명 이상이 용산고에서 S 대학에 합격 하였는데 나는 낙망하고 보니 양자택일 중 선택하여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하나는 재수 다른 하나는 2차 대학에 원서접수. 부모님께 죄스러워 도저히 재수는 못 할 것 같아서  2차 대학 어디에 원서 접수를 내야 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

이제 앞날을 생각할 나이도 되었으니 내 직업이 무엇이 나한테 합당하고 쉽게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곳이 외국어대학 인도네시아어과 이다. 왜 하필 인도네시아어과 인가하면 그 해 처음으로 입학생을 뽑는 학과라 해서 택한 것이다. 나의 앞날 직업을 공무원, 직장생활. 교수 등을 생각해 보았다. 한번 낙망하고 보니 2차에서는 무조건 합격할 수 있는 곳 이어야 되고 1회 졸업생은 공부만 잘 하면 교수는 틀림없이 될 자신이 들었다. 당시에 2차 대학으로 외국어 대학이 알려져 있었고 1회이면 교수가 쉽게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상향 곡선을 그어 나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하향 곡선으로 변하고 다시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이런 과정 을 밟게 되는 것 을 알지만 1964년 이란 해는 나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급강하 하는 미끄럼 틀 이였다.

깡 촌에 있는 초등학교도 1 회 졸업 생 23명 중 2등으로 졸업 했다. 6학년 에서는 1등을 했지만 6년을 총 계산 하여 학교에서는 졸업식에서 2 등 상을 준 것이다. 중학교는 280명 중 8등으로 입학 하고 2등으로 졸업 했다. 당시 용산고등학교는 8학급 중 7학급은 용산중학교에서 올라오고 1 학급만 타 학교에서 뽑은 것 이였다. 즉 전국 중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들만 입학 했다. 지금 까지는 인생 상승곡선으로 왔으니 당시로서는 1963년이 꼭지 점이 된 것이다.

1964년의 이른 봄 첫 등교 길은 매서운 추운 날은 아니어도 음산하기 만 했다. 학교 건물은 낡은 현대식 건물, 차라리 고풍이 드는 건물이든지 아니면 현대식이면 산뜻한 맛이라도 있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학교 건물은 그 시대 가난한 대한민국 어쩔 수 없다 치고 교문 입구는 아직도 표면이 질퍽질퍽 배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교정이었다. 교문 앞 도로 시설이 공사 중 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여하튼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는 나만의 자신을 위한 집 디자인, 설계, 건축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살기 편하고 멋이 있고 견고하게 지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아 이집은 내가 그리던 꿈의 집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은 집을 내 작품이라고 부른다. 7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의 남은 인생 재2의 황금기에 하고자 하는 일이 되었다.

 

울고만 싶던 대학 일학년생

 

첫 전공과목시간에 공부는 해야겠는데 책은 고사하고 프린트 교재도 제대로 없었다. 흑판에 몇 자 적어 놓고 받아 써가며 배우는데 한 숨만 나온다. 교수는 2차 대전 시절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다온 분이다. 나는 그 교수님을 탓 할 수는 없었다.

학교가 새로운 학과를 만들려면 적어도 교수진과 학생들이 배울 교재만이라도 프린트라도 해서 준비해야 했는데 너무한 것 같다. 대학이 아니라 초등학교보다도 못한 야학당도 이 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학생들은 거의가 공부 할 마음이 없고 웅성웅성 시간만 보냈다.

학교 측 에서도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몇 개월  후 20대 후반의 아주 멋드러지게 키가 큰 미국인이 강의실에 들어 왔다. 미 대사관 서기관이라 한다. 프린트 물을 준비 해 왔는데 엄청나게 많았다. 열심히 가르쳤다. 처음으로 서양 교육 방식을 접한 것이다. 난 중학교 시절부터 미국유학을 꿈을 꾸었섰는데  그러나 말이 되는 이야기 인가. 시골 깡 촌 부유한 농사군의 아들인 내가 그 고생하시는 부모님한테 학비 달라 하여 유학을 생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고 가끔 꿈에 그리곤 했었을 뿐이고 서양이 선진국인 것은 교육에서 나오는 것 이란 것을 이때 미 대사관 서기관으로부터 나는 알 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엔 공부할 교재가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이 문제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라 공부 할 마음이 없다. 

지금까지 학교생활 이란 거의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대학생이 되고 보니 급우 간에 나이 차가 8살 정도 차이도 난다. 출신고등하교는 4대 공립이 5명 4대 사립이 4명 그런대로 친구도 사귈 만하지만 공부하고는 먼 학생들도 많다. 그 미국인 교수는  몇 번 나오더니 학생들이 반응이 없으니 더 이상 나오지를 안았다.

대학생활 1, 2 개월이 지난 후 나는 이러다간 교수는 커녕 아무것도 못할 놈팽이가 될까 걱정이 덜컥 났다. 그래서 학교 다니면서 다시 한 번 S 대학에 입학시험 볼 계획으로 다시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하였다. 소위 말하는 재수생 이다.

이러다 보니 대학 일 년의 꼭 이수 하여야 할 학점을 다 이수하지 못 했다. 인도네시아 변호사. 변리사로 있는 이승민에 의하면 1학년 때 교수진은 김이배(과장서리), 정원국  장선영, 정풍실, 전수홍, 수하은 이렇게 여러 명 인데 내 기억에 남는 교수는 한 두 명뿐이다. 학과를 얼마나 등한시 했는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1학년을 전공 과목도 잘 공부하지 못하고 재수생으로 공부만 하다 보니 가장 즐겁고 패기에 찬 젊은이로 지내 야 할  대학 1년이 하나의 지옥으로 보낸 것이다. 고등학교 때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은 만날 염두도 못 내고 그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이렇게 울고 싶기만 하던 마인어과 초기와 세월이 흘러 군대생활 3년과 대학 후반을 거치는 동안 긴 시간 후에는 늘 웃음이 깃든 희망찬 인생 상향 곡선에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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