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린 시행착오를 겪다.
가족이 도착하였다. 아이들 학교, 내 할일, 쇼핑 등 매일 바빠졌다. 나는 셋을 모두집에서 가까운 공립학교 Baulkham Hills High School 에 입학시켰다. 큰딸은 고2(11학년) 둘째딸은 고 1(10학년), 막내 아들은 중3 (year 9)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고는 먹고 살 일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지날때도 많았다.
몇개월이 지났는데, 큰 딸 영어선생님이 학부모가 학교에 좀 오라는것이다. 뭔지도 모르고 아이학교를 갔다.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였는데 우리아이가 숙제를 해 오는것을 보니 아무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알아듣고 주제를 모르 는것 같으니 집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영어를 좀 가르치도록 해달라는것이다.
나는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맡기면 학교가 인간을 만들고 실력을 다듬는다. 우리 집에서 이 아이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 그러니 우리는 집에서 가르칠수도 없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를 쓸모있게 만들어 주십시요” 라고 하면서 “아마 지금은 온지가 얼마안되어 모든것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잘 가르쳐 주시면 진도에 속도는 있을 것입니다. 걱정을 끼쳐 미안합니다”. 했다.
그러고 집으로 오면서 아이들에게 충분한 학습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미안했다. 그후 몇개월 이 지냤다. 학교에서 영어선생이 다시 호출했다. 나는 화가나서 이번에가면 좀 싫은 소리하고 와야겠다고 버르고 갔다. 선생님은 친절히 안내하며 웃으면서 이제는 우리 아이가 잘한다는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의기 양양해서 한마디 했다. “우리 아이가 일본 에서는 항상 톱 수준으로 우등생이였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애써주신 보람이라 믿는다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나중에 졸업할때 감사하게도 자기 학년에서 우수한 성적이였고 원하는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하루 빨리 생활에 정착하기 위해, 시드니 모닝 헤랄드 신문을 사서 Business for Sale 찾아 다녔다. 아마 알아본 종류가 10종류 이상일것 같다. 호주 사람에게 큰 돈안 들이고 안정적이며 먹고살수있는 업종이 뭐가 있느냐 물으니 “Bottle shop”, News Agency”, “Milk Run” 이라 했다. Bottle Shop 과 News Agency는 최소 $30 만불은 있어야 작 은것이라도 살수있고 Milk Run 은 $10만불 선에서 할수있어서 시험삼아 한번 해보기로했다. 새벽 3시부터 5시 정도 까 지 동네 우유배달이었다. 2-3개월 small Business 를 조사했는데 할만한 것은 돈이 비싸고 내 예산 $10 만불 선으로는 어설픈 가게뿐이였다.
그러던 중 서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주 가서 밥이라도 먹고사나? 궁금하여 전화한 것이다. 너 호주서 Plastic Scrap을 수집해서 종류별로 구분해 서 포대에 포장해서 서울로 보내면 자기공장 (전화기 공장)에서 가격만 맞으면 사용할테 니 한번 보내 보라는 것이였다. 너무 반가워서 그 이틑날 차에 Trailer 끄는 고리달고 Plastic 공장을 찾아다니며 폐품을 수집했다. 다음 문제가 보통이 아니였다. Plastic 종류도 너무 많고 싸이즈도 수 십 종류고, 수집한 Plastic을 모아 둘 집하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Trailer를 차에 달고끌어 보니 앞으로는 운전이 되는데 후진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였다. 그라고 공장들이 모두 좁은 골목 끝이나 주차장도 없는 영세지역에 있었다. 후진하다가 남의 차를 박아서 사고도 냈고, 딱지고 끊고, 벌금도 물고 싣고와서 우리집 차고에 부려놓고 밤에 야간작업으로 분류하고 작업을 해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어려워서 사람을 한사람 파트타임으로 고용을 했다. 냄새와 쓰레기로 집이 어지러워지니 집사람의 성화가 시작되었다. 우선 쌤플이라도 보내봐서 어느 정도를 해야 합격이 될 것인지를 간파해야했다.
우선 1차 쌤플을 비행기로 보냈더니서울서 야단이 났다. 쓰래기를 비행기로 실어 보냈다는것이다. 가격은 그 다음 문제였다. 친구전화가 왔다. “야, 이렇게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쌤플을 보낼테니 그렇게해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쌤플을 받어보니 Plastic을 열처리해서 동글 동글하게 구슬같이 만들어 보내야한다는 것이였다. 열처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며 시설은 무엇이 필요한지 지식이 전무한 나로서는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어 미안하지만 두손 두발 다들고 포기했다. 날려버린 비용과 시간은 좋은 교훈이 되었고 도와주려던 친구는 감사할 뿐이였다.
며칠 후 또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산업을 하는 형제같이 지내는 친구인데 “너 할일은 찾았나? 시드니 오징어 수출물량이 있는지 조사해서 물량이 있으면 오파가격을 내어 보라는 것이다. 서울서 나에게 신용장을 개설하고 내가 직접 업자에게서 받아 수출해도 되고 번거로우면 오파로 내 수수료만 얹져서 신용장을 업자에게로 열어주면, 내 생활비 정도는 카바되도록 해 보겠다는것이다. 시드니 수산시장에가서 알아보니 오징어는 국내수요도 모자라서 수출은 못한다는 것이였다. 맥이빠져 나오는데 직원이 나에게 여기를 한번 가서 알아보라 하면서 주소 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공항 근처인데 오징어는 못하고 바닷가재 와 전복 두 종류만 일본 으로 비행기로 살아있는 생물상태로 수출하고 있었다.
거기서도 맥이 빠져나오는데, 사장이 나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라 하며 사무실로 들어가자 했다. 이야기인 즉 자기가 지금까지 약 100만불 정도 투자해서 일으켜세운 사업인데 일본에 수출하는데 수출 물량은 많은데 자금이 딸려 일본 오다를 다 소화를 못한다는것이다. 자기회사에 $10만불만 투자하고, 공동대표 이사로 운영을 하고 지금부터의 영업이익은 반반 하는것으로 변호사불러 회사 등기하고 은행가서 입출금 서명 등록하고 곧장 출근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일본말도 되고 영어도 되니 내가 회사를 지키고 자기는 일본에서 수출물량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앞뒤 따져 볼것도 없이 이것이 찬스라는 착각에 홀려 곧바로 은행에가서 잔고를 보니 $10만불을 빼면 먹고 살일 이 걱정이여서 $6만불만 은행수표 로 만들어 영수증도 없이 그에게 주었다. 내일 출근해서 필요한 절차를 처리하기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친구에게 전화로 오징어 수출은 물량 부족으로 안되고 대신 내가 바닷가재와 전복을 수출하는 회사에 좀 투자하고 공동 대표 이사로 일하게 되었다 했더니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사람도 가세해서 큰일 저질렀다고 함정이 있을것이니 잘 조사해 보라고 걱정했다. 나는 순간 너무 성급히 낚시 미끼를 물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일본에서 철강회사 회장님이 당부하신 말이 생각났다. 절대 3년동안은 덤비지말고 차가운 돌위에서 3년을 견딘후 일을 시작하라하신 말씀이 가슴을 두드 렸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일본사장이 자기는 일본 출장 좀 다녀 올테니 그동안 사무실 좀 부탁한다 했다. 일본에가서 수출물량 오다 좀 받아오고 앞으로 거래할 수입상들을 점검하고 오겠다 했다. 출장을 보낸 이틀 후 커피한잔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에 건장한 호주사람 4명이 들어왔다. 어떻게오셨느냐 했더니 일본 사장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만나러 왔다기에 지금 일본 출장 중이라고 했더니 “너는 누구냐”? 묻는다. 나는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들은 꼭 검찰 이나 아니면 뒷골목 깡패같은 무례한 사람들같았다. 생긴것부터 어수선하고 예의라고는 없었 다. 그들은 나를보고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느냐 하기에 몇일 되었다 했더니 “잘 되었다. 우리는 돈 받으러 왔는데 너가 대표이사니 책임지고 돈 내 놓으라는 것이다”. 깜짝놀라 무슨일 인지 차근히 알아듣게 말해달라 부탁했다.
그들은 어부들이였다. 어부들은 선금을 받고 고기를 잡으면 그 회사로 납품하는것이다. 내가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맹추같은것을 알아차리고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일본이름 ONS) 일본에 가서 경매시장을 통한 수입업자들에게서 내년도 호주에서 보내줄 물량만큼의 금액을 포괄적 으로 선수금을 받어온다. 예를 들면 한회사에서 $10만불씩 다섯회사정도 선수금을 받어와서 고정 어부들에게 일부 선금을 지불하고 어부는 고기를 납품하고 고기는 일본경매시장으로 수출하고 경매에서 팔리면 팔린 량 만큰 팔린금액으로 선수금에서 삭감해 나가는 것이다. 거기에따라 호주에서는 5%씩 수수료를 먹는다. 그런데 이 일본친구가 작년에 받어온 선수금을 어부에게는 외상으로하고 바닷가에 자기 집을 샀다. 몇달동안 어부들은 돈을 못받으니 고기 납품도 밀리고 돈 독촉에 밀려 결국은 일본에 선수금 구하러 간 것이다. 부채가 늘어남에 어부들은 이놈을 잡아 죽일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당신이 대표이 사니 책임지고 지불하라 그렇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겠다고 협박했다. 이것 큰일 났구나 싶어 정신을 가다 듬고 말했다. 내가아무것도 모르고 일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이 문제는 ONS가 일본서 다음주에 오니 협의해서 빠른시일내로 해결해 보겠으니 오늘은 돌아가달라 사정했다. 그후 부터는 일이고 뭐고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민오면 아무것도 모를때 보통 사기를 당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을 내가 겪는다 생각하니 참을수 없었다. 당장 이 함정에서 빠져나 가야 겠다는 생각에 변호사를 찾아갔다.
내가 투자한 돈부터 받어내는 것이 우선이였다. 변호사는 돈을 줄대 영수 증을 받았느냐? 물었다. 나는 일할 욕심이 앞서서 함정은 상상도 못하고 영수증도 없이 그를 믿고 주었다. 영수증이 없다하니 변호사는 그럼 두 방법이 있다면서 첫째는 사업에 투자를 했다면 못 받는다. 사업이란 잘 될수도 있고 못 될수도 있기 때문에, 리스크는 나의 몫이다 했고, 둘째는 개인에게 차용증을 받고 빌려준 것이면 세월은 오래 걸리지만 상대가 능력이 있으면 법적으로 받을수 있다. 그러니 출장에서 돌아오면 차용증부터 서명을 받아 놓아라, 그리고 소송을 하는 것이다. ONS는 젊어서 부터 고기잡이 배를 타던 어부여서 고기는 박사인데 영어는 아주 서툴렀다. 그래서 사무실에 그의 심부름을 하던 한국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 니 한통속이였다. 차용증을 영어로 만들고 내용은 개인에게 빌려준 것으로 이자는 몇%로 하고 언제가지 상환한다는 조건을 넣었다.
그가 시드니에 도착한 다음날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클럽에서 술한잔을 했다. 그때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내가 투자한 돈의 영수증을 못받았 는데 아무리 동업이라하더라도 앞으로 더 투자할 일도 생길것이고 너도 더 투자할수도 있으니 잊어 버리기전에 차용증에 싸인해 달라고 내 밀었다. 그는 이것이 뭐냐고 물었다. “아무리 동업이라 해도 서로 투자한 금액은 상호 확인하고 가는것이 좋지 않겠느냐 라고 설득했다. 그는 쾌히 싸인했다.
그 이틑날 나는 회사를 못나간다 통지하고 변호사와 상의해서 회사관계를 정리했다. 그리고 변호사에게 돈을 받어달라 의뢰했다. 한 두달 지났다. 변호사는 이것을 자기회사가 취급하기는 적합하지 않음으로 다른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 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집에서 잔디를 깍고 있는데 앞집 사람도 그시간에 잔디를 깍고 있어서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잠시후 그가 잔디기계를 끄고 나에게로 와서 악수를 청했다. 시간있으면 자기 집에 초대할테니 마음 편히와서 차한잔 어떠냐? 했다. 나는 잠시후 그의 집에 갔더니 그의 부인과 예의를 갖추어 커피를 대접했다.
나는 이민 온지 얼마 안 되었고 처음에 파라마타에 살다가, 집을 사서 Castle hill로 들어왔으며 이 동네가 참 좋다고 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느냐 묻기에 아직하는 일은 없고 얼마 전에 돈을 좀 빌려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야 일을 시작할수있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돈인데? 묻기에 얼마전 수산업하는 일본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느낌이 잘못된 것같다 했더니, 그가 자기명함을 주면서 혹시 내가 도와줄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는 시드니에서 유명한 Collection 회사 사장이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설명했다. 그는 걱정 할것 없다 내가 받아 주겠다 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 감사했고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고 믿고 싶었다.
얼마 후 Collection 회사의 실무책임자가 회사로 한번 나와서 좀 더 이야기를 할필요가 있으니 내일 한번 나오라는 것이였다. 그날밤 내가 돈 빌려준 일본친구가 밤늦게 우리 집에 전화를 해서 공갈 협박이였다. 입에담기 어려운 욕설과 심한 협박을 해서 집사람이 겁에 질 릴 정도였다. 잠을 설치고 다음날 Collection 회사에가서 도대체 그놈에 게 어떻게 했길래 밤에 전화로 협박을 하더라 했더니 걱정마라 이제부터는 전화 못하도록 하겠다 하면서 안심시켜주었다. 그리고 일시불로는 상황이 어렵고 매달 $1만불씩 상환하면 어떻겠나? 하기에 쾌히 승락했다. 며칠 후 일본친구 ONS가 전화로 “돈은 꼭 갚을테니 그회사가 제발 자기에게 전화 좀 안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였다. 내생각에 아마 행동대원이 겁에 질리도록 조치 를 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그 다음달 부터 6개월에 걸쳐 또박또박 입금되었고 수수료도 떨어져 나갔다. 앞집 사람께 감사인사를하고 친하게 지냈다.
영어 62 오식원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