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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마지막 해 4 학년 – 김흥기 동문

 

1964년 대학 1 학년을 인생 하양곡선으로 단정한 내가 1970년 대학 4학년은 인생 상향 곡선에 서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나의 실력도 많이 향상 되었다.

처음에 생소 하던 상과대학 과목들이 많이 익숙해졌고 외대에서 배우는 것 보다는 친구들 덕분에 타 대학 상과대 과목을 많이 배웠다.

그리하여 4학년은 어느 정도 자신하고 서울 시내 여러 대학에서 유익한 강연회에 찾아다니면서 지식을 넓혀 갔다. 

 

주말 특히 방학기간에는 지금은 더 많겠지만 당시에도 본인이 알아서 찾아다니면 당시 명성 있는 교수들이나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 강연에 참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4학년 마인어 전공과목 교수진이 보강 되었다. Djoko Pradopo, 최봉호, 말레지아 대사관 직원.  Pradopo 교수는 학교 다니면서도 엉터리 내 인도네시아 말로 여러번 대화도 하고 심성이 좋으신 분이라 친근감이 있었다. 내가 현대건설 만 2년 본사 마치고 호주로 올 때 김포 비행장 에서 만났다. 임기 마치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나와 홍콩에서 하룻밤 같이 보낸 기억이 새롭다. 최봉호 교수는 우리 마인어과 학생들에게 특히 나에게 마음을 써 주시던 분으로 나중에 까지 기억 되는 분이시다.

 

4학년은 두 개의 전공과목 공부도 괘도에 올라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외대생은 자기 전공이 주고 부전공은 하나의 둘러리로 학점만 따면 그만이지만 나는 부전공이 전공이 되고 전공이 부전공으로 바뀐 상황이다. 하지만 이젠 주위 돌아가는 것도 들리고 눈에 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여자 보는 눈이 좀 뜨이기 시작했다.

1968년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밤 세움을 해 가면서 놀던 이야기는 군인 이였던 시기라 군인 생활 글을 쓸 때 하려다가 학생 신분으로 노는 것 이여서 여기에 기록 하는 것이 낫겠다.

68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 올 무렵 휴가차 서울에 나가 친구 들을 만났는데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는 재미있게 보내자고 한다. 함지호가 종이쪽지를 주면서 그대로 행동 하라는 것이다. 읽어보니 12월 24일 오후 6시에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손에는 신문지 말아 들고 있으라고 되어 있다. 군인으로서 1 박 2일 휴가증을 가지고 집에서 잠깐 사복으로 갈아입고는 주어진 약속 장소에 나갔다. 키가 상당히 크고  날씬한 얼굴이 훤한 여대생이 다가와 내 이름 대면서 맞느냐고 한 다.

그 다음은 안양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별로 할 말이 없다.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도 하기란 그렇고 근 3 년 전 대학 2학년 때 놀던 시절 이야기 하자니 빽빽한 버스에  서서 가는데 제대로 말하기도 힘들고 들리지 안 는 상황이다.  퇴근 시간이라 당시 말로 콩나물시루 버스다. 운전사는 일부러 그러는지 운전대를  이리 둘리고 저리 돌린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고 우리 둘은 말은 주고받은 것도 없이 오랜 시간 동안 버스에서 시달리며 갔다. 

안양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길 몇 번 돌아  찾아가니 지호 승남 일영 카플이 모여 있다. 4 쌍 8 명이 하룻밤을 그 옛날 시골에서 무슨 이야기 하고 무엇하고 놀았는지 지금은 50년 전 일이라 하나도 생각 안 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 올 때  한 친구가 날 보고 너 네 파트너와 사귈 것이냐 고 물어 온다. 생각하길 내 꼴을 보라 원래 까만 얼굴에 군대에서 사병생활로 몸무게는 지금보다 10 키로가 적었었고 군복에 밴 내가 사복 입은 것 은 꼭 남의 옷 빌려 입은 꼴이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안이야 내 타입이 아니라 대답했다.

그 친구는 그럼 내가 한번 노력 해 본다고 한다. 나는 오늘 중으로 군부대에 들어가야 되니 안심 하고 잘 해 보라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사가 안 되었다 한다. 이 안양 파티로 인하여 함지호가 다른 친구 파트너 허락 받고 애인 만들어 사귀기 시작 하면서 가끔 날 보고 사진사 노릇을 하라고 한다.

나는 무엇이든지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이미 고 1 때부터 아주 친했던 부자로 살던 장헌식의 말을 듣고 카메라를 구입 했었다.   무던히도 친 했던 장헌식은 몇 년 전 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 했다. 이 친구도 나에게 여자를 소개 해 주고 싶어  이대에 다니는 자기 이모 딸을 되리고 두 번이나 함께 산에 갔었는데 단 둘이는 한번 도 만나지 않았다. 내가 회사생활 할 때 그 여학생이 친구 보고 산에 함께 갔던 오빠 친구는 어디에서 무엇 하느냐고 몇 번 물었었다고 한다. 

헌식이가 어느 정도 카메라 기술을 가지고 있어 그로부터 배우기도 했지만 내가 원래 미술을 잘 했던 학생이라 사진 인화 하면 좋게 나왔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요즘은 사진은 기술 그리 생각 안 해도 구도만 잘 잡으면 Smart phone 이나 카메라도 자동화 되어 있어 잘 되지만 그 당시에는 조정해야 될 것이 많아 사진 찍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안 는 시기였다. 

내 나이 환갑 때 미국으로 여행 갔었는데 함지호 집에 초대 받아 하루 밤 자면서 옛날 그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 사진 기억 하느냐고 벽에 걸려 있는 자기 부인 사진을 가리킨다. 내가 저 사진을 찍었는지 놀랄 정도로 잘 찍은 사진이다. 누구나 자기 집에 오면 어디서 어느 사진작가가 찍었느냐고 물어 본다고 한다.

 

1969년 3 학년 때는 위와 같은 인연으로 그 어느 누구 보다도 지호와 잘 어울리고 다녔다.  한번은 지호가 자기 애인과 사진 찍고 싶은데 1970년 3월 1일 수원에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날 보고 너도 좋은 기회가 될지 모르겠다고 한다. 수원 신갈 IT에서 수원 시내 가다 보면 당시로서는 오른편에 큰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병원이다. 지호 애인이 이 병원 간호사로 근무 하고 있었다. 지호 애인이 자기 친구를  나한테 소개시켜준다고 병원정문으로 간호사복을 입은 한 간호사를 되리고 나온다.

그때 날 보고 함박웃음으로 웃는 이여자의 얼굴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여자 보다 도 미모나 그 웃음이 월등이 달라 한번에 반해 버렸다. 정신이 다 나가 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데 친구가 지금은 근무시간이니 근무 끝나고 시내 다방에서 넷이서 만나기로 하였다고 하여 발길을 돌렸다.

이미 근무시간이라 그 여자는 발길을 돌렸는데도 나는 몇 번이고 그 정문을 되돌아보며 그 병원을 나왔다. 나는 원래 미모가 좋은 여자 앞에선 주눅이 들어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다. 그리고 예쁜 장미꽃이 가시가  쎈거처럼 예쁜 여자는 다 그러리라는 관념이 붙어 있어 방금 만난 저 여자와 사귀게 될는지는 좀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다르다 콧대가 센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몇 번 만난 여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끌린다.

여기서 미인이라 하는 것은 오늘날의 미인과 다르다. 요즘에야 올리랴, 메꾸랴, 깍으랴 모든 수단 방법으로 의사가 하는 것에 추가해서 화장품의 값이 쌀 몇가마 값을 쓰지만  당시엔 일본말로 구루무 한번 바르던 것도 사치한 것이다. 그날 수원 어느 다방에서 넷이서 대화 나누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지호가 어떠냐고 물어온다. 덤덤하게 “ 좋아 ” 하곤 내 말은 끝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 녀의 그 밝은 웃음은 나한테만 그리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누구나 보면 그렇게 웃는다. 속았다면 물르라 한다.  

그 후 우리는 시간 나는 것을 조정하여 기회만 있으면 만났다. 아마도 서로 탐색 전 이였던 것 같다.  문제는 나는 9월이면 취직 시험이 있는데 이렇게 여자에 빠져 원하는 곳에 합격을 못 하면 어쩌지. 이런 식으로 앞 길 을 망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여자를 놓질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공부 하랴 애인과 데이트 하랴 시간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4월 말 경 창경원에 들어가 정문에서 몇 십 미터 함께 걸어가는데 내 손을 잡는다. 그 때 그 기쁨이란 처음으로 여자한테서 받아보는 느낌이다. 이젠 자신이 붙었다. 애라 모르겠다.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자.

경제학을 입사 시험에 택하려고 밤이면 고 3 시절과 같이 공부 하였다. 학교는 수강 과목만 있으면 강의 듣고는 빈 시간은 타 태학 도서관에 가서 공부 하는 것이다. 4학년 학기말 시험이 다가와 애인한테 이야기하길 내가 1, 2 학년 때 놀기만 해 이번에 시험 잘 보아야지 안 그러면 학점 못 따는 입장이라 우리 2,  3 주 간 만 만나지 말자고 했다. 화가 나는지 대답도 안 한다.

잊고 있는데 편지가 왔다. 거기에는 미나노 다리라는 시와 자기 사진까지 동봉해서.  그 사진을 채상 앞에 놓고 공부 하려니 머릿속에는 시험 볼 과목내용은 하나도 없고 같이 놀러 다닐 때 각가지 다른 표정의 얼굴만 떠오른다. 둘이서 떨어지면 못 살아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는데 친구들은 여기저기서 주말이면 놀러 나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함께 만나자. 그래서 서울 근교 산 들을 함께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로 돌아 다녔다.

 

일학년  때 학점을 못 딴 두 과목 중 한 과목은 어학 실습 과목이다. 일학년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데 그들의 나이는 나보다 5, 6 년 어린 학생들이다.  최 봉호 선생님은 이런 내가 안 쓰러 보였든지 유난히 신경 써 주시고 나는 성적이 통과 할지 걱정 되었었는데 그래도 좋은 점수를 주셨다.

 

취직시험이 한두 달 남을 무렵 이승민이가 캠핑 가자고 한다. 나는 노는 데는 무조건 예스 하는 사람이라 오케 하니 우리를 형이라 부르면서 잘 따르던 67학번 최영도 김성중 이와 함께 수목원으로 간다고 한다. 신나게 놀다가 해질 무렵 친구들에게 고향에서 부모님이 오셔 나 미리 집에 간다고 하니 극구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그 집단에서 이탈 했다.

빨리 서울로 와 타 학교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다. 외대 도서관으로 가면 아르바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들아 그때 내가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지금 지면으로 사과한다.  이승민이와 학교 다닐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겨울철 점심 도시락이 얼어 있을 때 보통은 도서관 난로위에 놓아 뜨겁게 해서 먹지만 가끔 몇 십원 돈이 있으면 외대 뒷문으로 나가 짜장면 집에 도시락을 주고 짜장밥 만들어 주십사 하면 식당 아줌마가 맛있게 비며 주던 그때를 그리곤 한다.

 

이제는 정작 기다리던 취직시험 원서 접수하는 시점이 되었다. 외환은행 삼성 현대 세군데 (대우는 아직 중소기업 수준) 어디를 택할까 하다가 삼성은 이미 가까운 친구 박승남 이훈영이 군대 안가고 삼성에 취직하여 3년 먼저 입사 했다. 그래서 현대 아니면 외환은행 어디를 택할지 고심하고 있는데 67학번인 최영도가 날 보고 형 부르면서 자기가 외환은행 원서 넣겠다고 한다. 그러니 날 보고 양보 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좋아 하고는 현대건설을 택한 것이다. 필기 시험과목은 경제학 영어 두 과목이다. 내가 원래 수학을 잘 해 경제학은 수학에서 많이 나오는 그라프를  많이 그려 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거시경제를 도표를 가지고 이론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사문제도 문제가 나와 당시 경제신문에 자주 나오는 SDR 특별 인출권 이란 단어는 교과서에 없었던 말들이다.

여하튼 나는 우수 상과대학 졸업생들과 겨누어 경제학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다음은 영어 인데 다행히 문법 위주의  시험지가 아니고 구어체 즉 회화에 가까운 문제들이다. 나는 2학년 때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청량리 대왕코너빌딩에 있는 미국 대학생들이 가르치는 영어 회화 반을 오래 수강했다. 나이가 비슷한 발랄한 미국 남녀 대학생들이 평화 봉사단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 선생 겸 미국 대학생들과는 몇 차례 서울시내 고궁을 다니면서 산 영어를 배우는 기회가 있었다.

이 시기는 군에 입대 전 2 학년 때인데 같이 영어 회화 공부하던 학생들 하고도 놀러 다니기도 하였다. 한번은 홍대 미대 여학생인데 나한테 이야기하길 미술관 관람을 같이 다니자고 한다. 처음으로 여대생이 둘이서만 나가자고 해 기분이 좋았는데 무슨 일이 있어 약속 날 자 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 여학생은 내가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이곳 미 평화봉사단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 덕분에 영어시험도 무사히 마친 것을 기억된다. 필기시험 합격이 되고 남은 것은 면접과 영어 인터뷰다.

미국인이 이것저것 물어온다. 미 대학생들과 대화 하는 경험이 있었던 관계로 시험관과 즐겁게 대화하였다.  이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날 보고 마인어과 졸업반인 것을 알고는 영어로 물어 보며 인도네시아 말로 답변하라 한다.

순간적으로 이 면접관이 인도네시아 말을 안다면 인도네시아 말로 물어 올 텐데 영어로 묻는 것은 면접관이 인도네시아 말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내 인도네시아 실력은 포기 한지 오래 이고 바닥에서 학점 따는 수준이라 회화는 어림도 없다. 시험 보는데 하라고 하니 나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면 떨어질게 뻔하다. 그래서 이판사판 인도네시아 말 몇 개 단어 넣는 것으로 1, 2분 동안 엉터리로 씨불렁 거렸다.

아마 이게 먹혀 들어간 것 같다. 회사로서는 영어 하지 인도네시아어 까지 할 수 있는 사원으로 생각한 것이다. 나 자신은 텅 빈 강정인데 말이다. 취직 시험이 끝나고 학년말 시험까지는 시간이 있어 이젠 애인과 데이트도 대 놓고 할 정도로 늘 같이 다닌다. 학교도 되려가고. 한번은 마인어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최 봉호 교수님도 함께 외대 교문 앞 다방에서 담소하고 나오는데 중정에 근무 하시면서 마인어를 가르치시는 최 교수님이 날 따로 부르신다. 날보고 졸업 후 중정에 자기와 같이 근무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답변 드리기를 지금 현대건설에 시험 보았는데 결과 나오는 대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그때 내가 현대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지 않나 생각된다.  지금은 그곳이 명칭도 여러 번 바뀌고 공채로 시험보아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줄이 없으면 상상도 못 할 때다. 나뿐만 아니라 몇 명한테 이야기 하셔 64, 67 학번 등 여러 명이 이곳에 근무하게 되었다.  며칠 후 합격이 되어 학교에 나가 나 현대건설에 합격 하였다고 하니 모두들 친구들이 축하해준다. 

대학 4년 이제 마지막 시험 보는 시기가  다가 왔다. 3, 4 학년 그래도 열심히 해 졸업 학점이수는 그리 걱정 아니 할 정도이고 이젠 취직도 했다 생각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시기다. 무역학 시험 전 마지막 수업에 들어갔다. 무역학과장님이 교수인 과목이다. 출석부를 열고는 우리 학생들은 출석을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한국은행에 시험 보아 합격한 학생이 있느냐 물으신다. 아무도 없다. 그러면 현대 삼성 금성사에 합격 한 자가 있느냐고 물어 보신다.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이  손을 드니 어디냐 라고 하시어 현대건설이라 대답 하였다. 학번이 몇 번이냐 하시어 64934 이라고 말씀드리니 너는 시험 볼 필요 없다. 무조건 A 학점이라고 하시며 내 학번을 적으신다.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의 모든 눈이 내게 꽂혔다.

수업시간 지나 밖에 나오니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파프아뉴기니아 대사를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마친 여한종 친구가 무역학과 학생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다. 2, 3 주 전 대학 축제의 하나로 상경학부 주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길이란 주제로 경연대회가 있었다. 나는 2,3, 4 학년 지속적으로 구독 하는 것이 경제신문, TIME 잡지, 사상계 잡지를 구독했다.

그후 TIME 잡지는 호주에 와서 그러니까 1990 년대 까지 정기 구독 한 것 같다. 고려대 에서는 TIME 잡지 가지고 강의 토론 등 동호회가 있었는데 여기에 시간이 없어 가입 못한 것이 나중 까지도 후회가 됐다. 정기 구독한 경제신문 칼럼을 계속 캇트해서 모아두어 이를 토대로 글을 작성 연단에 섰다. 내가 봐도 학생이라기 보단 상당히 수준 있는 내용인데 3명에게 상을 주면서 전부 상경학부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그때 우리 과 학생들이 날 응원 차 강당에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날 수업이 끝나고 나오자 여한종이 친분이 있는 무역학과 학생들에게 보아라 너희들 끼리 다 상을 나누어 가졌지.  실력이 있는 김흥기를 빠트렸는데 오늘 보았지 너희들 제대로 취직 한 학생이 어디 있느냐.  하고 큰 소리로 말한다. 무슨 일이 있는 가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이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는다.

이로 인하여 나는 일약 외대 4학년 말 경 유명세를 탔다. 마인어과 친구들은 64학번 67학번 할 거 없이 우리 과 위상을 세워 졌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그때 도서관 앞을 지나노라면 전혀 모르는 학생들도 쳐다보고 눈인사를 한다. 1970년 9월 외대에서 상경부는 나 하나가 확실 한 것 같고 어학 전공 분야에서 1970 말 안에 이름이 있는 직장에 취직 된 학생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당시 취직 이란 게 그렇게 힘들 때의 취직이라 보람을 느꼈던 것이고 이것도 2년 후에는 중동 바람이 불어 각 회사에서는 일할 사람 못 구해 취직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누구한테나 기회가 많았다.

내 생각엔 1973년후 졸업생들은 나의 이야기가 실감이 안 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직장 골라잡아 선택 했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하고 생각 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운이라는 것이 몇 년 사이에 다 다른 것이다. 

물론 애인 한태도 나 취직이 되었다고 말 해 주었다. 그러나 반응이 별로다. 나중에 말하기를 자기는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을 안 했는데 자기 친구들이 다들 대단하다고 한단다. 69년도 E 대 여론 조사에서 현대건설이 신랑감 순위 1 번으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이야 많은 좋은 회사들이 있어 그 옛날의 명성은 퇴색 됐지만 당시엔 현대건설 잠바만 입고 나가면 서울시내 어디가도 외상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해 현대건설이 시험에 공채로 165명을 뽑았는데 건설 말고 자동차, 현대양행 금강실업 등 자회사로 발령받아 나간 사람도 있고 대부분 공대 출신으로 현장에 나가거나 자재부 등 갈려 나갔다. 조선은 아직 설립회사가 안된 상태였다. 나를 포함한 소수만이 본사 정주영 회장 정인영 사장 라인에 근무하게 되었다. 회사를 떠난 지 까마득하게 오래 되였지만 지금도 그때 알고 있는 분들의 이름이 언론에 나오면 옛날 생각이 난다.

학장으로 직장생활 마친 안영호 교수는 학생들한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마인어 하기 실으면 부전공이라도 열심히 하라고, 김흥기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정명신 사장은 학교 다닐 때나 그 후 가장 오래 서로 통화하고 만난 사람이다. 고등학교 1 년 선배인 동시에 대학 같은 학과 동창, 이러한 인연도 있겠지만 우연이도 용산역에서 신병 훈련 마치고 다불백 매고 만나는 일도 있었다. 학교 졸업 하고도 살고 있는 동네가 비슷하여 자주 만났었고 호주로 온 후에도 서울에 가면 꼭 만나는 사람, 오래 오래 이런 인연이 되길 바라고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한 두명 싸움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 들이 있었는데 대학에오니 이제 머리가 커서 그런지 다들 친하고 싶은 동창들이다. 가는 길이 다르고 내가 호주에 살고 있어 그렇지 서울에 있었으면 여러 명을 자주 만났을 것 같다.  무역업을 하는 현희일이 자주 만났던 친구인데 지금은 전화가 안 되여 궁금하다. 김천권 졸업 후 집이 가깝고 호주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가면 그의 사무실을 여러 번 찾아 간 기억이 새롭다.  신성철 이헌은 자카르타에서 만났을 때가 가장 반가웠었고 서울 정규모임에서 여러 번 만난 박승일 형, 홍성훈, 이승후, 홍운표 한영준 다들 그리운 얼굴들이다.

1970년도 마음에 드는 애인도 생겼고 취직도 했으며 학점 모자라 졸업도 못 할 가봐 걱정이 되었는데 이수학점이 초과 되었다. 이로서 1964년도 인생하양곡선에서 완전 탈피 인생 상향곡선에 서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애인하고 놀러 다니는 일만 남았다. 애인이 직장생활을 하니 틈나기만 기다려 만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좀 짓궂은 데가 있다. 망난이 노릇도 많이 하고 약간 개구쟁이 근성이 지금 노년에 와서도 남이 오해 받을 때가 있다. 한국식은 이런 매너가 점잔하지 못하다 하게지만 호주에 와서는 처음 만나면서 누구하고나 농담하고 특히 집 건축에서 외국인  Tradesman 과 빨리 친숙해지는 데는 아주 적합한 것 같다. 연애 이야기 옛날로 돌아가서, 하루는 수원 어느 잔디밭에서 둘이서 앉아 심심하여 어린 시절 꼬마친구들과 놀던 장난을 친 일이 있다. 진디 씨 길게 올라온 것을 뽑아서 보여주며 이를 이빨로 살짝 물고 눈을 감고 하늘을 보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 라고 하니 따라 한다.  나는 잔디 끝 부분을 잡아당기니 잔디 씨가 입안에 가득하다. 그제야 내가 놀려 먹은 것을 알고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다.

얼마 후 날 보고는 얼굴 한쪽이 별로라고 한다. 그러면 다른 쪽은 어떠냐 하니 멋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는 항시 그쪽이 보이는 곳에만 방향을 잡는다 한다.  집에와서 거울을 보고 아무리 보아도 나는 내 얼굴 이쪽이 보기 싫고 저쪽이 보기 좋다는 느낌을 못 받는다. 인간은 좌우가 완벽한 대칭인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어딘가는 짝재기란 이야기다. 얼굴의 양면이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 사진은 보기에 좋고 어느 사진은 별로다.

64년 일학년 때는 나 자신 자신이 없는 때라 별로고 2 학년 때는 신나게 놀았으니 괜찮았으리라 믿는다. 군대 생활은 가방 끈 긴 것과 타고난 건강으로 졸병이지만 자신에 찬 나날 이였다. 늘 카메라를 지니고 있어 군 생활 앨범이 따로 있다.  얼마 전 “태양의 후예” 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송준기 포즈가 자주 화면에 나온다.

어 저 포즈 내 앨범 어디에 인가 있는 것 같은데 하고는 군대 앨범을 자세히 보니 나의 졸병 때 사진이 송준기와 똑 같다. 그래서 마누라한테 보여 주니 바로 핀잔을 주면서 그게 뭐가 잘 생긴 얼굴이냐고 퉁하고 한마디 하고는 그만이다. 그래서 제 삼자 몇 명에게 보여주니 더 잘 생겼다 하고 놀려먹기만 한다. 여하튼 나는 그 사진을 카카오톡에 올려놓았다. 

 

다시 연애 이야기, 하루는 보통 때 보다 아침 일찍 만났는데 갈 곳이 없다. 순간적으로 속리산 생각이 나서 속리산을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로 하고는 떠났다.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이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속리산은  하루여행이  무리한 거리다. 버스가 느리고 자주 없으며 운행 스케쥴을 빼먹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원래 난 무대보라 가자고 하니 그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고 날 믿고 가자고 한다. 버스가 안 다녀 하룻밤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기를 기대 했지만 누가 운이 좋은지 나뿐지 돌아오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수덕사는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다녀 온 일이 있고 이날 두 번째이고 호주에 살면서 호주인 거래선 과 한 번 더 가본 일이 있다.

그날 문제는 등산복이 아니라 난 신사복이요 애인은 하이힐에 초미니 스커트 차림이다.  등산객들은 내려오는 시간이고 우린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총을 피할 수가 없다. 산에 가는 두 애인의 옷차림이 명동거리를 걷는데 알맞은 옷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도저히 수많은 눈들을 견디지 못하고 원래 가고자 했던 곳 까지는 못 가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그 날 막차버스를 탈 수 있었다.

 

카지노에 가는 꾼들은 돈을 잃으면 말 안하고 돈 따면 자랑하는 거나 낚시꾼은 큰고기 잡은 것만 자랑 하지만 나는 여기에 솔직히 연애 열차가 선로에서 탈선 해 멈추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 둘은 출생과 처한 위치가 다르다. 애인은 금 수저 출신이고 나는 동 수저 출신이다. 애인의 아버지는 이범석 선생과 정치인생을 함께 하신 분이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 까지 함께한 분이다.  그리고 대구사범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이 나라를 위해 함께 일 하자고 여러 번 사람을 보냈으나 이범석 선생을 배신 할 수 없다 하시고 끝내 합류하시지 않으셨다. 애인의 어머니 또한 고등교육을 받으신 인태리 이시다.

나는 흙 수저가 아니고 왜 동 수저 출신 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도 모른 상태에서 당신의 아버지를 여의시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천석군은 못돼도 백석은 하신 분이다. 충남 보령군 웅천면 동부에서 제일 부자 소릴 들으셨다. 내 남동생이 고려대 4학년 겨울철에 농촌 봉사대 나가서 산에 갔다가 눈에 쌓여 결코 내려오지를 못했다. 이로써 우리 아버지는 자포자기를 하시고 더 이상 농토를 더 이상 확장 하시지 않고 현상 유지만 하셨다. 아마 이런 사고가 없었다면 아마 200석 까지는 충분히 하시고 남을 분이시다.

나는 왜 은 수저 출신이라 하지 않느냐 하면, 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워 당시 서울에만 살면 무조건 은 수저 출신 이라고 생각 하였다. 나의 남동생의 사고로 나는 4대 독자가 되었다. 경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이다. 족보를 보면 그분의 사진이 제일 앞에 나온다. 나는 54대 그러니까 6개월 전에 태여 난 손자는 56대 이다. 그러니 아버님은 늘 날 보고 장가 빨리 가라고 하신다.

그러나 애인은 위로 시집 안 간 언니가 있고 나이도 나와 4 살 차이라 아직 풋내기 처녀다. 결혼은 전혀 생각 안하고 그냥 좋아서 날 만나는 것이다. 하루는 만나기로 한 다방에서 기다리니 나타나지를 않는다. 보통 나보다 먼저 나오는데 뭐인가 이상하다 하고 생각 중인데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말하며 맞느냐고 한다. 나라고 하니 언니가 아파서 못 나오고 자기가 대신 나와 알려 준다고 한다.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누님 집은 그 당시 전화 신청 중이였고 대지가 넓어 가건물을 짖고 사탕공장에 세를 주었었는데 그 공장 전화로 우린 소식을 전 하던 때라 나는 학교에서 그 다방으로 나가게 되어 일이 이렇게 되었다. 이 여학생에게 차 한 잔 사 주면서 언니가 아프다면 내가 따라가서 만나도 되느냐 하니 약간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대보라 반응이 어떻건 그 동생을 따라 나서 집으로 간 것이다.

그 식구들이 놀래 순진한 딸의 남자가 나타났으니 그 집에서는 일대 대 사건이다. 내가 약간은 적극적이라고 생각 했는지 시간을 갖고자 아프다고 핑계 댓을 가능성이 많다. 본인은 진짜 아파서 못 나갔다고 하지만. 또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시점이 내가 남동생 사고가 있은 지 수개월 후의 일이라 나의 표정이 밝지를 안했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없고 늘 무표정이라 이 사람을 일평생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늘 저울 질 한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나의 약점은 또 있다. 사람 보는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 신호등 반대편에서 날 보고 웃으면 나는 무표정이니 화가 날 수밖에. 그 정도로 내 눈이 빨리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요즘은 더 하다. 눈에 관한 병중에서 가장 나쁜 한쪽 눈이 황반이다. 옛날 같으면 실명도 된다고 한다. 

 

애인 집에서는 날 보니 시골 촌뜨기 같고 마음에 안 찬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딸 두 명 선보게 하는 일이 중요 행사가 된 것 같다. 나는 예감을 잘 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수원에서 기차로 올라오면서 아무 말 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 내가 “선 봤지” 하고 말 하니 놀래 어떻게 알았느냐고 한다. 응 어제 밤 좀 이상한 꿈을 꾸어서 그리고는 누구와 만났느냐고 물으니 Blue House 근무하는 남자라 한다. 원래는 언니를 위한 소개팅인데 언니가 아파서 자기가 대신 나갔다고 한다.“ 멋있어” 하니 아니  “별로야” 끝.  정식으로 선을 본 것은  Blue House 남자 하나 더 있고 그리고 국회의원 아들, 근무 하면서  은행장이 며느리 삼겠다고 계속 말 하며 아들 한번 만나라고 하여 면회 온 그 아들을 본 일이 있고 병원에 근무하니 측은 덕 거리는 의사는 여러 명 , 한 의사는 술 먹고 자기 안 맞나 준다고 병실에서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횡패를 부린 일도 있다고 한다. 자기는 의사는 절대 NO 란다. 하나 더 자기 가장 가까운 친구 오빠가 산부인과 의사인데 친구 어머니가 며느리 삼겠다고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마다 이야기 한다 하며 자기는 의사도 별로인데 더군다나 산부인과 의사는 질색이라고 한다.

여하튼 나의 연애사업에 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애인의 부모님과 식구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고  다른 남자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니 나는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되나 생각에 잠기곤 했다. 대한민국 혼인 적령기의 남자는 다 내 적이다. 남녀관계는 무슨 이론이나 논리나 이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루어질 운명은 안 될 것 같아도 되고, 안 되는 것은 될 것 같아도 안 된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작전을 짜야 될 것 같다. 연애작전은 우선 전략부터 세워야 된다.  우군이 될 수 있는 지원군을 대거 확보해야 되고, 어떤 식으로 부드럽게 공격을 하며 언제 해야 되는지, 상대방 주위에게 Appeals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서 모아야 되는 등 1971 년도에는 할 일이 많다.   여기 까지는 학생으로서의 이야기 이고 회사생활 하면서 일 년 로라코스트 연애 스토리는 다음 편에 이어 나갈 것이다.

 

울고 웃던 대학생활 마무리를 하면서 64학번 마인어과 동창들이 어디에 진출을 했는지 정리를 해 볼가 한다.

64학번 말레이 인도네시아어를 전공으로 해서 즉 전공을 살린 동창들과 마인어과 인연으로 직장을 가진 동창;

안영호; 교수, 박사 학장,  정영림; 교수 박사 학장,  여한종; 파푸아뉴기니아 대사, 이승민; 인도네시아에서 변호사. 변리사 (현),  홍운표; 외무부 공사,     홍성훈 ; 외무부 참사관,   이헌; 인도네시아 코린도 부사장,   이주명; 인도네시아 남방개발,  신성철; 인도네시아 미원주재, 요식업, 미국 거주,      박승일; 정부단체 기관장

 

부전공으로 혹은 전공 부전공 과목과 관계없이 사회 진출 동창

정명신 (현대 중공업, 유원기업 대표 (현)),   이승우 (인천제철, 콤퓨타 회사 대표), 이진휴 (무역진흥공사), 고광국 (대한항공),

김흥기 (현대건설, 호주 Ko Aust 대표 (현)

 

강동식; (무역업, 서예사),  공성만; (매일경제 신문사, 골프월드 대표), 김대영; (하이퍼 가구 대표), 김천권; ( 삼원 트레이딩 대표), 박용길; ( 미국 Sandy Fashion 대표), 송천일; (관세사, 철강업), 오정근; (건설중기용역 대표), 최창식; (동국기업 대표이사 (현),  한계히;  (법원 ),  한영준; ( 천안동중 교장),  현희일; (무역업)

권건길; (미국 거주), 윤득춘; (미국거주), 이철헌; (자영업),  김홍규; (자영업),    엄기흥; (자영업), 오형만; (미국 거주),  채홍륜; (미국거주)

강신자; (미국 거주), 안혜숙; (영국 거주), 권순식, 이경자, 이길순, 양승길

상기 직장은 과거에 근무처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어 동창들에게 알린 후 수정하고 다 정리 된 다음 나의 자서전 책에 올릴 것이다. 위에 (현) 의미는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39명이 졸업을 했거나 아니면 알고 지내던 동창들이다.  54명이 입학 했지만 15명은 입학 후 전혀 동창들에게 보이지 않아 일찍 중도 하차 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6월 현재, 39명 중 이미 고인이 된 6 명 (이진휴, 여한종, 이주명, 고광국, 김홍규, 오형만) 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고인들에게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내 기억력이 조금이나마 더 많을 때 내 일생에 대한 자서전을 써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To be continued.